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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 작년의 흰 눈은 지금은 어디에
본문
늘 남을 가르치는 일로 바쁘게 지내다보니 때때로 어떻게 세월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마음을 가다듬어 작품을 쓸 겨를이 없을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올해엔 작품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다음의 장편 수필을 얻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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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흰 눈은 지금은 어디에
- 첫사랑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2 ns = "urn:schemas:contacts" />안종림 씨에게 바친다 -
진 우 곤
혹자는 부제 ‘첫사랑 안종림 씨에게 바친다’를 두고 굳이 이렇게 실명까지 명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게다. 즉, 이미 지나간 일을 들먹여 당사자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심하면 가정의 불화마저 초래할 원인 제공이 되지 않겠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내가 언급하는 이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고 궁금한 나머지 수소문하려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처럼 사람 찾기가 수월한 세월도 없으니까.
그러나 내 입장은 사뭇 다르다. 이 글을 전개하기에 앞서 미리 밝혀야만 될 것은 ‘안종림 씨’란 20대 초반 시절에 나와 첫사랑을 나누었던 당시의 ‘안종림 씨’이라는 것이다. 결코 시집이나 장가갈 자녀를 두었거나 이미 손주를 본 초년생 할머니가 되어 있을 50대 초반 정도된 ‘안종림 씨”가 결단코 아니라는 얘기다. 즉, 눈가에 잔주름이 어리고, 생기에 넘치던 얼굴도 피부의 탄력마저 잃어버렸을 게다. 또 몸매도 예전과 같이 반듯하게 균형이 잡혀있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이나 된 먼 기억 속의 ‘안종림 씨’를 찾는다는 것은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용이한 일은 아니다. 내가 이 글을 구태여 쓰는 것은 지난날에 그와 함께 가졌던 단순한 추억을 더듬자는 것에 있지 않다. 그럴 것이라면 아예 펜을 들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을 게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나도 여타 사람들처럼 그가 이제껏 누구를 만나 어떤 세월을 거치며 살아왔고, 왜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궁금증이 파도처럼 일렁이었다. 아니, 그가 이제는 나를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기나 한 것인지를 한번만이라도 그를 만나서 묻고 싶었다. 뿐더러 그간에 쌓이고 쌓였던 얘기의 보따리를 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 그런 갈망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부질없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즉,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것이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미 흘러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아닌가. 정녕코 그를 사랑했다면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면 섣불리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는 편이 나답지 않겠느냐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러자 나는 장님이 눈을 뜨듯 기쁨과 함께 홀가분함을 맛보았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때던가. ‘음미되지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흡사 그것은 정답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나에게 때맞춰 찾아온 신선한 충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하, 왜 진작에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던가, 그저 외로운 감상에 젖어서 수많은 세월에 갇혀 지내다니……. 나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서 옆에 누가 없다면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이에 나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진지한 조명과 함께 음미를 통해 삶의 본질을 규명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갔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사실 내 의식 속에 이따금 떠오르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 걸러지지 않은, 그 당시의 뭔가 석연찮은 결말이 매번 나의 가슴을 짓찧곤 했다. 그것은 내 애정사(史)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젠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혹은 앓던 이가 빠진 듯 마음이 가분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잠시였다. 먹고 사는 일로 굴곡이 많은 세월에 이리저리 부대끼다 보니 결국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붓을 들지 않는다면 가슴이 탁 트이지 않을 것이다. 뿐더러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계속 숙제를 붙들고 끙끙대는 학생처럼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따라서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인위적으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뿐더러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등 비겁하게 비켜갈 의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요,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게 무슨 유익이 따르겠는가. 또, 이 글을 쓴 이후에 어떤 변화가 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험자의 고백에 의하면 처녀총각 시절에 겪었던 첫사랑은 대체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즉, 성공적인 첫사랑보다는 여러 가지 사연으로 실패의 쓴 잔을 들이키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험한 말을 하며 남남으로 헤어지는 첫사랑이 더 많단다.
이는 젊은 혈기와 패기만 앞세운 나머지 첫 술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빚어진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밥도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듯이 어찌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은 사랑을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에 의해 칼로 무를 자르듯이 이별로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거나 트집을 잡아 감정과 자존심을 앞세운 격렬한 싸움 뒤에 분에 못 이겨 툭 내뱉는, 이제부터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끝으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식으로 헤어져서 돌아서서 간다는 것은 나로서는 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첫사랑의 실패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마음의 깊은 상처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이다. 어떤 이는 결혼을 해도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동정이나 처녀성을 받친 어떤 이는 결혼하는 것조차 아예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아가기도 한단다. 심하면 그것을 계기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여 생을 마감하거나 세상에 너 한 사람뿐이냐며 오히려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여봐란듯이 잘살 게라고 어금니를 꽉 물며 복수심을 불태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원수 져서 돌아서면 뒷맛만 고약하지 않겠는가. 산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나듯이 우연히 오다가다 만나게 되면 서로 어색할 것이고 아예 찬바람이 쌩쌩 날 정도로 외면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러고 보면 첫사랑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세상을 제 잣대나 욕심대로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처신하는 게 선결 요건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 볼 때 어떠한 경로를 거치든 첫사랑의 실패에 따르는 후유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리 썩 유쾌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시간이 흐르면 점차 희석되어 갈 수도 있다. 처음엔 자신의 가슴에 대못이 박힌 듯해 도저히 치유할 수 없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름다운 추억이나 아련한 그리움으로 자리매김하여 이따금 곱씹게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예외라고 할 수가 없다. 즉,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가도 어느 날 불현듯 그가 떠올려진다. 흡사 끊어진 필름이 이어지듯 한 곳으로 모이거나 혹은 퍼즐을 짜맞추듯 기억의 편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며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진정이 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이러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먼 하늘가를 응시하며 그와 함께하였던 아련한 추억 속으로 흠뻑 빠져들곤 한다. 이렇듯 인연의 끈이란 소가죽처럼 질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에 대한 기억은 영영 지울 수는 없을 게다. 그래서 사람이란 추억의 동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노라면 때때로 삶에 대한 스스로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키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살가운 누이처럼 용기를 북돋워주고 손을 잡아주던 그의 순수한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걷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그리움이 온 가슴을 채우는 게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면에선 격렬한 저항의 몸부림이 일고 있다. 남들처럼 실연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은 것도 아닌데 다 지나간 일을 왜 하필이면 지금에 와서 뒷북을 치듯이 들먹이느냐,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차라리 세상 떠날 때까지 비밀로서만 묶어두는 게 더 나을 텐데 하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세차게 도리질을 친다. 미제(未濟) 사건처럼 남아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나의 첫사랑에 대해 언제까지 꽁꽁 묵혀둘 것이냐, 재를 넘어선 수레처럼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는데 말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고, 그럴 만한 당위성 또한 내포되어 있다면 왜 망설이고 있느냐, 그게 진정 내가 나다운 일이냐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는 것이다.
나는 이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정식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허다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별의 이유처럼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아서 혹은 부모의 반대라는 등등에 있었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 텐데 말이다. 그것이 두고두고 나의 가슴을 울리며 헤어나지 못할 미궁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와 같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쌍방간에 가타부타 명백한 결론을 내릴 틈도 없이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묻어두고 살아온 셈이다. 아니, 그럴 기회조차 아예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즉, 실이 배배 꼬이듯이 꼬여 서로간에 소식이 끊긴 당시의 상황.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뭇 회한이 남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엔 나의 책임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도 나의 불찰, 즉 흡사 독수리가 먹이를 꽉 잡아채듯이 하지 못한 우유부단하고 나약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을 가눌 수 없다. 이는 마치 프로야구 경기에서 마무리로 나선 투수가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탓으로 눈앞에 둔 승리마저 날아가게 한 경우와 무엇이 다르랴
‘안종림’.
서두에서도 밝혔듯 이것이 아득한 기억 속의 내 첫사랑이었던 이의 이름이다.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그와 처음 만났던 때는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공무원으로 출발한 지 갓 1년을 넘긴 상태였고, 그녀는 통신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의 총무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와는 이따금 업무적으로 통화를 하다가 서로 친밀해졌다.
그러다가 서로간에 직접 얼굴을 보았으면 하는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식 데이트 신청이었다. 그와 나는 첫 대면이라 서로 어긋나지 않기 위해 전화상으로 약속 장소와 서로 알아보기 쉬운 옷차림으로 나가겠다고 정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지금처럼 전화 사정이 좋지 않아 수시로 연락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퇴근 후 데이트를 가졌다. 난생 처음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만나기로 한, 인천에 있는 부평 역 사거리 앞 모퉁이 제과점으로 나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그녀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해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혹시, 진우곤 씨가 아니세요?”
전화상으로 듣던 상냥한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눈에 호감이 갔다. 마치 형식과 내용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작품을 대하는 것처럼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귀여우면서도 지적인 데가 있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알맞은 체격에 걸맞은 수수해 보이면서도 단정한 옷차림도 맘에 들었다. 나는 마치 하늘에 오른 듯한 기분을 가눌 수 없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오랫동안 사귀어 온 소꿉동무처럼 자연스럽게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내게는 그를 만났다는 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얼굴. 진실과 순수가 묻어나던 눈빛. 입가에 어리는 잔잔한 미소. 그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는 시골에서 올라와 오빠네에서 함께 산다고 들려주었다.
첫 데이트치고는 무난히 소화해 낸 셈이었다. 그 후 우리는 별일이 없는 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났다. 그와 나의 단골 데이트 장소는 인천에 있는 부평 역 앞 사거리 쪽이었다. 그는 부천에서, 나는 주안 쪽에서 살기 때문에 서로가 이동하는 시간을 아끼고자 대부분 거기로 정해지기가 일쑤였다.
낙엽처럼 수북이 쌓이고 쌓였던 얘기들. 그는 김치의 양념을 제대로 버무리듯 얘기를 맛있게 할 줄 알았다. 재치와 유머 감각이 곁들인 그의 아기자기한 얘기를 듣노라면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이에 나는 자연을 노래하고, 어줍잖게 문학을 얘기하고 철학을 논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특히, 문학에 대하여는 신명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유명한 작가가 되겠노라고 은연중에 치기 어린 호언도 불사했다.
눈이 내리고 손이 꽁꽁 얼 만큼 추운 겨울이면 그는 내 코트 주머니에 자신의 손을 즐겨 넣으며 걸었다. 내 손이 유난히 따뜻하다고 하면서. 그리고 내 장갑이 얇고 낡았다며 가게로 나를 이끌고 가더니 새 가죽 장갑을 사 주는 게 아닌가. 정작 나는 그에게 가난한 호주머니 사정으로 맛있는 음식이라든지 근사한 옷 한 벌, 변변한 선물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는데 말이다.
월급을 타서 모처럼 내가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그를 음식점에 데리고 가면 매번 그는 자신에겐 된장찌개만으로도 족하다며, 먼 훗날을 위해 돈을 아껴 써야 한다고 마치 세상 물정을 훤히 아는 듯이 말하기도 했다. 헤어질 때는 아쉬워 뒤돌아서며 몇 번씩 손을 흔들어주던 그였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가슴속으로 황소바람이 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렇게 만나는 회수가 잦아지면서 우리의 정은 깊어갔고 허물없는 사이로 변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싸운 일도 없다. 자존심을 건드려 얼굴을 붉힌 일도 없다. 다만 물같이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여 그는 시간이 늦어 돌아서 갈 때에는 몇 발짝이라도 함께 더 걷자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의 관계를 친구 이상의 위험한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그를 결혼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 두렵기도 하거니와 선뜻 내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 보아서 그에게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주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많았다.
아버지가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싫다며 7,8년 이상을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낸 것이 화근이었다. 하여 어머니의 고생으로 그간에 알뜰살뜰 일궜던 재산을 밑천으로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호박씨를 한 입에 털어 넣듯 다 날려버린 뒤의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단지 길거리에 나앉아 있지 않달 뿐이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 덴 데 털도 안 난다더니 수년간 매양 그 모양 그 꼴이어서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도 여간 버겁지 않았다.
나 또한 무늬만 공무원이지 말단이라 손에 쥐어지는 월급이라고는 쥐꼬리만했다. 부모의 막일로 벌어들인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가는 형편을 그에게 보이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듯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림자처럼 질기게 따라다니는 가난한 집안에서의 사 남매 중 장남이라는 위태로운 위치. 학업에 대한 열망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한 환경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질곡이요 족쇄였다. 아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나를 짓눌렀다. 앞날에 대한 밑그림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맞부딪쳐 싸워보고자 하는 용기나 불굴의 투지 또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암담한 현실 앞에서 혼자 나는 자지러지고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흡사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힌 듯 아니, 새장 속의 새처럼 활기찬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여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이와 같이 무엇 하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내세울 게 없는 그런 상태에서 그를 공공연히 내 배우자로 점 찍고 맞아들이기엔 언감생심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런 용기조차 선뜻 나지 않았다. 그랬다. 이런 터에 장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그 당시 내게 있어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자주 만나도 내 입에선 ‘사랑’이란 말을 그에게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하여 나는 그를 친구로서만 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그가 부평 역에서 심야 남산순환 관광버스를 타고 갔다 오자고 말했다. 그러자고 하자 그가 손수 버스표를 샀다. 처음으로 멀리 나가는 셈이었다. 버스는 남산 쪽으로 가는 커브 길에서 실내등을 5분 정도 껐다. 나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내등을 일부러 5분 정도 끄는 것은 키스 타임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라는 게 아닌가.
그가 이것을 생각해 낸 것은 아마도 늘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의 감질나는 미적지근한 태도에 서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숨이 막혀서 일지도 모른다. 이성간의 우정이 깊어지면 사랑으로 변하지 않느냐고 덧붙이면서 그는 자신을 내 부모형제에게 소개시켜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장래에 시댁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가 사는 형편도 알아볼 겸 식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앞서도 밝혔듯이 우리 식구가 애면글면 구차하게 사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제 가실지 모르는 가난의 냄새가 풀풀 나는 집안에 뭐 자랑할 게 있다고 그를 데리고 온단 말인가. 더군다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굳이 그를 끌어들여 고생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고 싶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 와중에 산 넘어 산이라고 일이 뒤틀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입영 날짜가 곶감 빼먹듯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머릿속은 흡사 거미줄이 엉킨 것처럼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울분을 느꼈다. 막막할 것으로 예상되는 집안 형편. 아직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내가 누릴 복은 언제쯤 도래할 것이냐고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러한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서 어느 날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장기간 교육 출장을 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이 소식을 끝으로 쓸쓸히 혼자서 군복무에 들어가고 말았다. 자연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1년 남짓 군 복무를 마친 뒤 그의 회사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고, 전혀 연락할 길도 없다는 게 아닌가.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닿지 않아 전화마저 없었다. 하니 어떻게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을 게고, 1년 이상 나로부터 연락이 없으니 내가 그를 떼어버린 줄 알았거나 아니면 좋은 사람을 만나 시집이라도 간 게 아닐까. 아니, 아니, 변죽만 울리다 만 것처럼 여자의 마음만 흔들어놓고 감감무소식인 나의 신의 없음을 원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럴 공산이 컸다. 나로서는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이것을 계기로 그와 나 사이에 어떠한 언질로 없는 채 팽팽하던 연줄이 끊기듯 소식이 탁 끊기고 말았다. 그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맛보았던 쓰라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게 할 말을 다 못했는데…….
그 이후 부모형제 곁을 떠난 참으로 먼 곳인 강원도 강릉이라는 곳으로 복직 발령이 뒤따랐다. 그것 또한 내게는 설상가상이었다.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지만 그때 만일 결원이 있어 인천으로 복직 발령이 났다면 사정은 사뭇 달라졌을 게다. 어떻게든 그를 수소문하여 찾아보았을 것이 아닌가.
그 후 나는 암울한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러면서 온통 내 마음속에 가득 찼던 그의 모습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가난이 덕지덕지 묻었던 나의 20대 청년시절. 늘 회색 빛 차가운 안개가 끼고 가슴속 깊이 비가 주룩주룩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렇듯 가난은 나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능히 지녀야 할 패기만만함이나 용기조차 나와는 사뭇 거리가 먼 양 여겨졌고, 그것이 내 모든 생활에 있어서 늘 주눅들게 만들었다. 이러매 주위에서 결혼하라는 말만 나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가 일쑤였다.
다음의 시는 청년시절,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려 여러 곳으로의 여행 중 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북받쳐 단숨에 얻은 것인데 이십 년 이상이나 오래도록 묵혀 두며 애지중지해 오다가 몇 년 전에 시로서 발표할 기회가 있어 공개했다. 제목인 ‘내 사랑하는 여인’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를 일컬음이었다. 내용인즉 그의 아름다운 자태와 내게 기울였던 사랑을 표현할 뿐더러 향후 내가 걸어야 할 사랑의 길이 어떠해야 함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 후 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대상은 반드시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정을 두고 싶지 않았다. 국가나 민족 혹은 세계 인류로까지 나름대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내 모든 감정을 거기에 다 쏟아 부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 사랑하는 여인에게
누가 내게 준 선물인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아니, 잠시 눈 감고 생각에만 잠겨도
사랑과 그리움을 그물처럼 던지는
아름다운 꽃이 그 어디서 함초롬히 피어났을까
복숭아꽃 같은 연붉은 두 뺨에
얄밉도록 고운 살 내음이 번지는도다
내가 격랑에 휩쓸리어
오갈 데 없는 외로운 조각배여도
또는, 마음의 어느 한 편이 쓰러져
크나큰 아픔에 부대낄 때에도
그대는 나의 어머니의 젖줄처럼
아니, 다정한 누이의 손길처럼
나를 일으켜 세우고 보듬어 주도다
이 몸은 한 방울의 이슬이라도 좋으이
벚꽃처럼 화사하지 않아도
목련처럼 우아하지 않아도
그대와 나의 사랑이
늘 윤기가 나도록 씻길 수가 있다면
그리하여 하늘 끝에서도 땅 끝에서도
오로지 그대만을 위하여 살지니
다음의 시도 그와 데이트를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골수에 파고드는 그리움을 즉흥적으로 읊어본 것이다. 어느 가을 날, 하숙집을 나와 혼자서 강릉 경포호(鏡浦湖) 쪽으로 나가 노을이 지는 호숫가를 거닐었다. 길 위에 구르는 낙엽을 보자 나만 혼자 세상 끝에 뚝 떨어졌다는 서글픔과 맞물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모른다는 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지난날 그와 함께하였던, 무지갯빛 같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 회상을 하노라니 전광석화처럼 아래와 같은 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혼자서 2홉들이 소주 3병을 마시고 마냥 걸어서 하숙집으로 돌아와 그 길로 쓰러져 자고 말았지만.
내 사랑하는 친구여
해마다 늦가을의 이맘때쯤이면
늘 추위에 타기 쉬운 나의 마음은
너를 향하여 쓰러져 울게 하나니
화사하게 피어나는 그리움 속에
발걸음마저 휘청거리게 하도다
너와 내가 다정스레 주고받았던
영적인 밀어가 탐스럽게 열리고
저 높디높은 우정의 다리 위엔
단풍 든 시어(詩語)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장차 어느 시인의 가슴에 안겨야 좋으냐고
한창 재잘거리는 이 때에
황국(황국)의 향기 내 온 가슴을 휩싸고 돌아
너에게 바칠 나의 노래마저
봉선화 꽃물같이 빛나고 아름답거늘
저 성스러운 시의 제단 위에
왜 나만 홀로 번제(燔祭)를 드려야 하느뇨
먼 훗날
낙엽을 밟는 소리마저 향기로운 계절에
가슴을 열고 달려오라던
청순한 너의 모습 아직도 눈에 밟히는데
너는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기에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느뇨
내 사랑하는 친구여!
내 사랑하는 친구여!
언제 부모형제 곁으로 가리란 기약도 없는 객지 생활의 고달픔과 외로움. 나는 그것을 달래려고 틈만 나면 여러 곳으로 산천 구경을 다녔다. 그것은 실의와 좌절, 그리고 방황의 탈출구로서는 적격이었다. 장시간의 여행 길이어도 개의치 않았다. 자연과 친해지면서 차츰차츰 나만의 비좁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시도 얻으니 일석이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 지금도 버스비만 있어도 어디든 마음 놓고 갈 수 있었던 그때의 경험들이 소중한 재산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 나의 삶에도 변화가 왔다. 들어가는 나이를 어쩌지 못해 결혼을 했고, 가정도 가졌다. 아들, 딸도 낳았다. 결혼 후에야 부지런한 아내의 고생 덕분으로 질기게 따라다니는 가난에서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차츰 살림도 일어났다. 하여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남부럽지 않을 정도가 되자 그에게 약속도 했던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문학에 본격적으로 뜻을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곳 과천으로 오게 되었고, 문학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따뜻하고 힘있는 가슴을 그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워해왔다. 이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바로 이것밖에 없노라고 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물론 단 하루를 살아도 진정 내가 나답게 사는 보람과 긍지를 맛보기 위한 의도도 깔린 것이었지만.
이에 나름대로 세월을 아끼며 사는 법을 체득하려 발벗고 나섰다. 고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꾹꾹 참아내었다. 아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는 나도 어엿이 수많은 사람들을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자세로 직장 생활하는 틈틈이 작품을 써서 발표하거나 각종 문학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울적한 심사를 가눌 길 없다. 까닭인즉 흡사 공들여 한 숙제를 제대로 검사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게 더더욱 가슴이 저리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는 그렇게 자주 만났어도 정작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은 안타깝게도 단 한 장도 없다. 단지 내게 남겨진 것이라곤 ‘안종림’이란 이름 석 자와 그와 함께했던 애틋한 추억뿐이다. 용케 기회가 닿아 그를 만난다 해도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보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잠시 스치고 지나간 바람처럼 나를 까마득히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그도 먼 기억의 저 편에 나를 묻어두고 남모르게 그리움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살아있다면 말이다.
아, 타임머신처럼 그 빛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단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기를 망설였던 시절.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다가 사랑을 잃어버린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니다. 표현이 잘못되었다. 결코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앞서 밝혔듯이 그것은 종결이 된 것이 아니라 미제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누구에 의해서도 포기되었다고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제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나고 죽는 것이 엄연한 자연의 이법일진대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 세파에 이리 닳고 저리 닳은 모습의 그가 아니라 갓 피어난 꽃처럼 청순함이 싱싱하게 묻어나는, 내 먼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를 말이다. 대체 인연과 사랑이 무엇이기에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렇듯 느닷없이 새록새록 피어나며 가슴속을 휘젓는 것일까.
며칠 전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전철을 타고 그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예의 부평 역 사거리로 나가 보았다. 장마철이라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하여 그 옛날 단골이었던 제과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제과점은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었다. 빈 사무실로 남아 새로운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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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님의 댓글
한 여인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씀하실 수 있는 선배님의 괴뇌찬 사랑이
절절히 이 가을에 뭍어납니다.
고백할 수 있는 용기와 애절했던 사랑에 마음을 열어 봅니다.
글과 시 잘 읽었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李聖鉉님의 댓글
지우곤 동문이 필치가 감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