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몽당연필
본문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일학년인 용대는 향나무가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에서 선생님이“하나 둘” 하면 셋 넷” 소리를 내며 병아리처럼
여선생님의 뒤를 졸졸 따르는 급우들과 함께 재식훈련을 하였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2반 담임인 여선생님은 유난히 가슴이
크고 둥근 눈에 오동통 살이 오른 이십대 후반인 예쁜 미모의 여인이었다.
누나 말에 의하면 그 선생님이 교무주임인 말쑥한 아버지를 좋아한다고
며칠 전 귓속에다 대고 어머니 몰래 소곤소곤 말해주었다.
용대는 그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그 여선생님은 화장실에도
안가는 도시에서 자란 부잣집 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건평에 사는 진수가 오늘아침 그 여선생님이 교직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화장실 하부에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다 걸려 몹시 혼나고서도 뭐가 그리 잘했다고
떠드는 바람에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말았다.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그 애가 뭘 몰라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국어 받아쓰기시간,
몽당연필에 연신 침을 칠해가며 깍두기공책에 선생님이 불러주는 단어를 아이들은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눈을 돌려 나머지공부 대장 완수의 공책을 보니 선생님을 “서새니”, 학교를
“핵겨”, 영이와 철수를 “여니와 철사”로 적어 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연방 누런 코를 훌쩍거리던 코방구리는 완수 것을 몰래 훔쳐보고
답을 적다가 학교를 그만 “핵고”라고 틀린 답에 또 오답을 썼다.
용대가 보기에도 지지리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라 생각했고 분명 나머지 공부
5인방은 따로 정해져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빨간색 색연필로 채점을 해 주시고 아주 잘했을 경우에는
동그라미를 줄지어 여러 개 그려주셨는데 못했을 경우에는 호통과 함께
동그라미를 무성의하게 한두 줄 그리고 “노력하기 바람”이라고 빨갛게 친히 적어
주셨다.
두 친구는 받아쓰기에 빵점을 맞고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몽당연필을 가지고 싸움을 시켜 연필심을 부러뜨렸다.
필통에 몽당연필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물자 절약을 잘했다고 담임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으며 고사리 손에 잡히지 않아도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하거나
볼펜깍지에 껴 쓰는 애들도 있었다.
작달막한 귀여운 도토리 키 재기의 몽당연필은 책보에 싸여 뛸 때 유난히도 좌충우돌
달그락 거리며 자기 역할을 다하다 언젠가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최후를
맞이할 것이고 연필꼭지에 달린 지우개로 침 묻혀 눌러 쓴 글자를 지웠다 다시
쓰는 반 친구들은 앞으로의 긴 인생역정을 몽당연필이 되어 제 몸을 사르며
각자 나름대로의 삶을 써 내려갈 것이다.
교실마루 바닥은 나무판자라 구멍이 숭숭 나 있는데 그 틈사이로 아이들의 보물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학교가 파하자 노을 진 고즈넉한 텅 빈 교정에는 놀이기구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을 때, 용대는 교실바깥에 난 겨우 어린이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환기구멍으로
몰래 몸을 비집어 던졌다.
쾌쾌한 냄새와 수십 년간 쌓인 먼지 그리고 눅눅한 거미줄이 얼굴을 감쌌고
듬성듬성 마룻장 밑으로 드러낸 대못이 으르렁 뻘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니 선배들과 친구들이 그간 빠트린 학용품들이 지옥 여기저기서
줄지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당연필, 지우개, 삼각자, 크레용, 먹다 남은 말라비틀어진 골무떡, 갓 태어난
앙증맞은 선홍색 대머리의 생쥐새끼들이 낮선 방문에 놀랐고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꼬깃꼬깃한 지폐가 운 좋게 기다리고 있었다.
분실물을 건지는데 정신이 팔려 저 멀리 보이는 공기구멍이 아득해 어찌 다시
입구를 찾아 나갈지 겁이 더럭 났어도 양손에 듬뿍 들린 학용품과 지폐 한 장에
공포심을 잊고 있었다.
가까스로 기어 나와 몰골을 보니 이건 완전히 외계인이었고 땅거지가 따로 없었다.
다음날 용대는 반 친구들에게 영웅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아끼던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주니 칭찬과 격려에 어깨가 자꾸 위로 올라가고
고개가 사뭇 뻣뻣해졌다.
그러나 끝내 지폐만은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학교 앞 경애네 구멍가게에서 커다란
눈알사탕과 맞바꾸어 먹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용대는 강원도 영월로 하계봉사를 떠났다.
고참 선배들은 진료봉사에 나서고 용대는 내동 성당의 주일학교 교사 경험을 살려
여학생대원들과 여름학교를 분주히 열었다.
올망졸망 산골의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대하니 용대의 어릴 적 강화 산골
진강산 개구리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풍금에 맞춰 ‘.밀과 보리가 자란다.’ ‘얼음과자’노래 등을 배워하는 율동과 포크댄스를
따라하는 산골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귀엽고 순수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해도 마음을 열기시작하자 졸졸 선생님들의 뒤를 따랐다.
여름학교가 파하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 공책 장을 뜯어 선생님 주소를
적는 아이, 찐 옥수수를 수줍어 내미는 아이, 목에 때 낀 아이, 감기를 달고
살아 누런 코를 연신 들이키는 개구쟁이들이 너무나도 정겹게 느껴졌다.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산마을을 유일한 문명의 상징인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태곤의 “송학사” 노래를 들으며 그곳을 찾는 길은 험난한 여정인
고난의 행군이었어도 운무에 사로잡힌 첩첩산중 조그만 산골분교의 아이들은 정말
청청지역에서 수경 재배하여 자란 싱싱하고 오염되지 않은 농작물 같았다.
모기, 빈대와 싸우며 교실바닥에서 잠을 청하려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어도
그곳의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보니 용대의 어릴 적 생각이나 더욱 애정을 가지고
그 애들과 눈높이를 맞춰 신나게 놀아 주었다.
봉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그간에 든 정이 무언지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자꾸자꾸 되묻는 어린 산골소녀와 떠나는 여름학교 선생님들의
주소를 일일이 공책에 적으려는 그 애들의 몽당연필이 눈앞에 아른거려 용대는
아이들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용대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있었다. 아니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그 몽당연필의 추억은 애잔한 향수가 되어 오늘까지도 용대의 가슴속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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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몽당연필..우리의 못살았던 지난 시절..절약정신의 대표적 산물이 아닐런지요..난 지금도 연필하면 연필심 부러뜨리기 시합이 생각나네요..그때 미제연필 4H만 있으면 반에서 주름잡고 으시됐었는데..ㅎㅎ
윤용혁님의 댓글
인문형님, 글쓰기가 되서 다행이에요. 무더위에 잘 지내시죠? 맞아요. 미제 4H면 심도 굵고 연필싸움에서는 왕이었지요. 그 시절 그립습니다. 번번이 부러져 주인을 원망하던 연필들...요령을 피워도 부러져만가는 몽당연필의 비애를 처절히 느껴야만 했지요.ㅎㅎㅎ
형님, 오늘도 좋은 시간 되세요.
윤인문님의 댓글
항상 고마우이..그냥 음악이 좋아서 덧붙여보네<EMBED " src=http://pds3.egloos.com/pds/200707/16/91/phil_coulter_-_the_green_leaves_of_summer.wma width=70 height=25 hidden=true type=octet-stream AutoStart="-1" volume="0" loop="-1">
윤용혁님의 댓글
형님,음악 참 좋습니다. 형님의 삶에 의지가 담긴 "마이웨이" 노래가 웬지 듣고 싶군요.
즐거운 하루가 되세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미제연필 4H 보다쌘것은 우리땐 연필심안쪽 나무에 연필로 덧칠해 연필심처럼 만든것이 최고였네..
윤용혁님의 댓글
ㅎㅎㅎ 그렇군요. 환성형님, 음악이 넘 좋지 않으신지요? 덧칠 연필심 공책에 잘 안써지는
것이 아니었는지요?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그 연필심 약간은 있어야지..어릴적 기억을 어찌 다 기억하남..내보기에 용혁님은 신동이여..神(귀신신)童..
오윤제님의 댓글
내 다닐 때 교실은 마루바닥이었고 반질반질 윤낸다고 초칠하던 기억이 나네요 옹이가 뚫펴 그 속으로 들어간 연필 그 연필 주으려 공기통 조그만 곳으로 들어가 한웅큼 주어 친구들 나누어 주는 영웅이 되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신명철님의 댓글
젤로쎈것==> 4H연필 안쪽나무에 연필로 덧칠해 연필심처럼 만든것.ㅋㅋㅋ<BR>
아님...가리방 긁던 철심??
윤용혁님의 댓글
환성형님, 여름휴가는 다녀오셨는지요? 건강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오윤제 선배님도 영웅이 되셨군요? 추억을 향유하신 선배님, 멋지신 선배님이십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신명철 선배님, 가리방 긁던 철심, ㅎㅎㅎ 최고가 되겠는데요? 선배님도 연필싸움 많이 하셨죠? ㅎㅎㅎ 비법을 알고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