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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 왕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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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 왕의 후예들
진 우 곤
근무처가 서울에 있는 관계로 나는 주로 전철을 이용하여 출퇴근한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걷고 타고 하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어떻게 하다 보니 아직 운전을 못 배웠기 때문이다.
닭장 속 같은 전철을 타게 되면 벽과 천장에 부착된 각양각색의 광고물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은 로또 복권에 대한 광고다. 내가 이제까지 발견한 그것에 대한 두 개의 광고를 볼 때마다 입맛이 사뭇 쓰다. 흡사 벼룩의 간을 내어먹듯 가난한 국민들의 호주머니 돈을 호리고 알겨먹으려는 얕은 수작 같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수준도 낮고 꽤나 유치하기 짝 없다.
한 광고는 승객들로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연회색 정장차림의 한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철 문이 거의 닫힐 찰나 그녀는 ‘호호호, 그래도 내게는 로또, 로또가 있다!’고 외치며 위를 쳐다보고 빠져 나오려 애쓰고 있다. 헌칠한 키에 제법 잘 생긴 편이나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위험천만하기 짝 없는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다. 누군가는 허허 웃음을 짓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하도 어이가 없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거나 뭐 저런 여자가 있는가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있다. 또는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도 보인다.
또 다른 광고는 한 경양식 집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청바지와 시원한 색상의 티를 입은 종업원인 젊은 미남 청년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양손에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손님에게 나르다가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에 ‘하하하, 그래도 내게는 로또, 로또가 있다!’고 웃으며 외치고 있다.
그가 웃는 모습은 앞서의 아가씨의 웃음보다는 좀 건강하고 밝아 보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주변 몇몇 손님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사뭇 걱정하는 빛이 역력하다. 뿐만 나이라 종업원과 인라인 스케이트라니 다소 걸맞지 않을 뿐더러 경망스럽기 짝 없다.
아무리 로또 복권이 선풍적인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다지만 광고에까지 이토록 천박스럽게 요란을 떨 수 있단 말인가.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을 자행하는 모습을 버젓이 내세우다니 한심한 생각조차 든다. 어려운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방법은 강구치 않고 그저 로또 복권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떠벌리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국민은행이 주관 운영하는 로또 복권의 연합 발행하는 곳을 살펴보면 행정 자치부를 비롯한 자그마치 10개 주요 부처의 각 산하 기관일 정도로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전국자치복권행정협의회, 과학 기술부, 국민체육진흥공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근로복지공단, 건설교통부, 산림조합중앙회, 중소기업진흥공단, 제주도가 이것들이다.
이러고 보면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경기 침체로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대박’ 혹은 ‘인생 역전’ 운운하며 사행심을 조장하기에 앞장서고 있는 꼴이 아닌가. 흡사 먹이 하나에 목숨을 걸고 너도 나도 달려들어 뜯어먹으려는 형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정 로또 복권 판매로 조성된 기금은 100% 전액을 공익을 위해 쓰겠다는 취지라면 왜 좀더 차분하게 의미 있는 장면을 광고에 실으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작년부터 혜성처럼 나타난 ‘로또 복권’의 위력은 지금도 대단하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있어서 심심찮게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복권 구매에 있어서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초창기엔 현금서비스나 대출을 받아서까지 샀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이렇고 보니 어느 때부턴가 그 폐단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1인 당 10만원을 초과할 수 없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아직도 그 열풍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퍼뜩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왕’에 관한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굉장한 부자인 데다 세상에서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믿을 만큼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였다.
어느 날, 실레노스라는 노인이 왕 앞에 끌려 왔다. 까닭인즉 그가 왕의 포도밭에서 제일 크고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훔치다가 들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대뜸 그 노인이 자신이 숭배하는 디오니소스 신의 스승이며 그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반갑게 맞아들여 주야 열흘 동안 성대하게 술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 후 ‘주신(酒神)’ 혹은 ‘포도주의 신’이라고 불리는 디오니소스 신은 자신을 찾아온 미다스 왕에게 실레노스를 환대해 준 대가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소원 한 가지를 말하라고 했다. 이에 왕은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하자 디오니소스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왕은 자신의 왕궁으로 돌아오면서 그 약속의 진부를 가리기 위해 조바심을 참지 못하여 곧 시험해 보았다. 우선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러자 나무줄기와 잎사귀가 즉시 황금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조약돌 한 개를 집어도, 사과를 한 개 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는 궁전의 문이며 커튼을 만져도, 심지어 손을 씻으려고 물에 담그기만 해도 그 지경이니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배가 고파서 먹으려는 음식물마저 그의 손이나 입술이 닿는 즉시 황금으로 변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포도주도 입 안에 들어가면 황금덩어리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러니 갈증과 배고픔을 전혀 달랠 수가 없었다. 왕은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공포에 떨었다.
그때서야 왕은 자신의 소원이 너무 경솔하여 취해진 것이라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게 된 그는 서둘러 말을 끌어내어 탔다. 손에 잡은 고삐마저 황금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리석은 소원을 제발 철회 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왕은 신의 자비로 말미암아 팍토르 강에 가서 온몸을 깨끗이 씻는 것으로 그 무서운 소원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황금에 덴 맛을 본 그는 이후로 황금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재물에 대한 탐욕의 추구가 어떤 말로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신화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신화는 오늘날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적용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거듭되는 경제 불황의 여파 탓이다. 이에 따라 황금만능주의가 갈수록 고조되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복권, 경륜, 경마, 주식, 카지노, 부동산 투기와 같은 사행심을 부추기는 열풍이 급속도로 번지는 추세다. 자연적으로 건전한 가치관이 여지없이 붕괴된 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겪고 있으며, 돈에 관련된 범죄도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될 지 걱정이 앞선다.
토요일 오후 퇴근길이다.
선릉 역에서 전철 2호선을 타고 오다가 내가 사는 과천 방면으로 가는 4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사당 역에서 내렸다. 역 구내는 가히 인산인해를 방불케 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붐벼 일대 혼잡을 일으키는 바람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전철 4호선이 도착하자 간신히 전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몸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탄 객차엔 수많은 사내들의 몸에서 풍기는 땀 냄새와 옷에 배인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단정치 못한 머리, 그리고 저마다 들고 읽는 것이라곤 스포츠 신문에 난 경마 출사표가 아닌가. 어떤 말이 우승 후보이고 다크호스라며 큰소리를 내고 떠드는 통에 얼이 빠지고 귀가 멍멍해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 대부분이 경마장으로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태령과 선바위 역을 지나 경마공원 역에 도착하자 그렇게 붐비던 승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러자 전철 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가 찾아왔다. 전철은 오늘도 허황된 대박을 꿈꾸며 비좁은 계단을 오르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대공원 역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에겐 또 즐거운 저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모 방송사의 로또 복권 추첨에 눈과 귀를 집중시키다가 실망하여 ‘에이, 또 꽝이야!’하고 깊은 한숨을 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다음에 또 그들은 로또 복권 판매점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미다스 왕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손대기만 하면 대박을 터뜨려 인생을 역전시켜 주리라고 잔뜩 기대를 걸며 로또 복권 판매점으로, 경륜장이나 경마장으로, 증권사 객장이나 카지노로, 부동산 중개업소로 오늘도 바삐 달려가고 있다. 마치 저 타죽는 줄도 모르고 뜨겁게 달아오른 불빛에 냉큼 뛰어드는 하루살이들처럼 말이다.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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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님의 댓글
미다스의 손도 그러하지만 해지기 전 까지 말 타고 달려서 말뚝 밖은 땅을 차지하다 죽은 일화도 있다 던데 사람 욕심 한이 없을거예요. 로또 복권이라도 있으니 우리네 희망 갔는 것은 아닌지...... 물론 한번도 산적은 없지만
윤용혁님의 댓글
미다스의 손처럼 인생사 한탕주의를 경계합니다. 하루살이나 불나비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만연한 우리 황금만능주의의 사회 일면을 보는 것 같군..그래도 로또 한번 맞아봤으면 하는게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