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안중인(眼中人)
본문
도처에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군요. 까마득히 높아진 하늘이 그렇고, 조석으로 부는 삽상한 바람이 그렇고, 흘러가는 맑은 냇물이 그렇습니다. 늘 바쁘게 사는 생활이라 그런 계절의 정취를 제대로 감상할 여가가 없다는 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문득 예전에 발표한 작품을 꺼내 읽다가 가을에 정취에 맞는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들어 잠시 먼 하늘가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사람이란 진하디 진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중인(眼中人)
--- 육촌 누나에게 바친다 ---
진 우 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만 되면 여러 방송국에서 기다렸다는 듯 심야에 귀신을 소재로 한 프로를 즐겨 방영한 적이 있었다. 잠시나마 무더위를 식히기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어서 인기도 꽤 높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그것에 푹 빠지곤 했다. 나 역시 이따금 그들과 함께 보았는데 밤중이라 그런지 심심찮게 재미를 솔솔 느꼈었다. 사실 귀신에 관련된 얘기라면 누구나 무릎을 바싹 당겨 앉으며 귀담아듣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엔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불가사의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 방송국에서는 아예 그 내용을 정규 프로그램으로 고정화 시켜 사계절 가리지 않고 방영하고 있다. 나름대로 시청률이 괜찮다고 판단한 모양 같다.
나는 그런 프로를 접할 때마다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그러니까 신혼 초에 아내와 내가 처녀귀신으로 말미암아 홍역을 치른 일이 문득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홀로 으슥한 골목에 접어든 것처럼 모골이 송연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그것을 십여 년 동안 아내를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 사건엔 쉽사리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3년 전 여름 밤, 절친한 이웃들과 야외에서 어울릴 때였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가 갑자기 귀신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리는 게 아닌가. 이에 저마다 몸소 겪었거나 남에게서 들은 것을 옮기느라 신바람이 나서 집에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나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앞서 얘기한 대로 신혼 초의 경험담을 불쑥 꺼내놓고 말았다. 듣는 이들은 한결같이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기막힌 사건이라며 그 소재를 방송국에 보내라고까지 입을 모으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그걸 굳이 밝혀야 했는지 하고 후회했다. 마치 고이 간직해온 순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듯 부끄러웠다. 아니, 신성한 곳에서 어리석게 불경한 짓을 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날 밤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산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혼 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제 펜을 든 것도 수차의 망설임 끝에 이루어졌다. 이유인즉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또한 나만의 비밀을 이렇게 지면을 통해 공개한다는 게 조금은 쑥스러워 쉽게 용단이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다. 물론 아직도 곰삭지 않은 사건이지만 나이를 더 먹기 전에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즉, 사람의 기억엔 한계가 있는 것이니 나중에 가서 회고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이라도 사건의 내막과 나름대로의 생각을 소상히 기록해 두면 그리 무익하지 않으리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물론 향후 그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도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다시 정리해 볼 문제다.
나의 신혼생활이 시작된 것은 1985년 봄이었다. 직장 때문에 처가가 있는 강릉에서 단독주택 2층을 전세로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며칠 동안 아내와 나는 회사 직원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인척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느라 쉴 새 없이 바빴다. 그것이 어느 정도 끝나자 우리만의 오붓한 생활을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신혼의 단꿈은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다. 까닭인즉 내가 때 아닌 가위눌림으로 밤마다 시달리기 때문이었다.
매일 꿈속에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날씬한 키에 똑같이 생긴 두 여인이 찾아왔다. 더군다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끈한 몸으로 말이다. 그들의 자태는 어느 한 구석도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표정만은 이상하리만큼 신앙심이 매우 깊은 이처럼 엄숙했다. 따라서 나에겐 가슴이 설렌다거나 뜨거워지게 하는, 이성에 대한 이상야릇한 감정 따윈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내 좌우에 누우면서도 주저한다거나 스스러워 하는 기색이라곤 거의 없었다. 곁눈질하니 내 곁에 있어야 할 아내는 우측으로 한 여인 건너 누워 자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시중 침묵을 지켰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숨막히게 했다. 나 또한 어찌 된 영문인지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맞닿은 그들의 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얼음장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서 전해져 오는 냉기에 내 사지도 점차 뻣뻣하게 굳어지는 게 아닌가. 나는 혹시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는 게 아닐까 하고 더럭 겁이 났다.하여 돌아눕거나 그 자리를 박차며 뛰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은 무엇에 단단히 결박된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까,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그들에게 어서 냉큼 물러가라고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들은 귀가 먹었는지, 아니면 내 고함이 허공에다 주먹질을 한 셈인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점점 엄습해 오는 공포에 내 삶도 결국 이것으로 마감되는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고함을 치려 했지만 입 속에서만 맴돌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찌하다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난 것 같다. 주위를 살피니 덮고 자던 이불이 먼 발치께로 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 서슬에 아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며 내 팔을 흔들었다. 이에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멍하니 천정만 응시했다. 그런 뒤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하듯 도로 슬그머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그 이전의 꿈속으로 되돌아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자 나로서는 밤을 맞는 게 여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가위눌림으로 여러 번 깨어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수면 부족으로 눈은 항상 충혈되고, 얼굴은 마치 선풍기를 오래 쐰 것처럼 부어 있었다. 더구나 몸도 물 먹은 스폰지 같아서 매사에 짜증이 앞서고, 직장에서도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가 왜 그리 몸부림을 심하게 치느냐고 투덜거릴 때마다 답변이 궁했다. 그의 말인즉 잠결에 느닷없이 내게서 따귀를 맞거나 발길에 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매일 그런다니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러고 보면 내가 귀신 때문에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갔다.
더 이상 견디다 못한 나는 기어코 아내에게 꿈속의 일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아내는 몸이 허약해서 그런 것 같다며 여러 가지 처방을 끌어들였다. 보약을 달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좋다는 민간 요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나에겐 여전히 그 흉한 꿈만 꿔지는, 참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괴이쩍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일요일 아침,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마치 애를 낳으려는 듯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나는 그가 혹시 상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하고 약을 사다가 먹였다. 그러나 별무신통이었다. 아내는 오전 내내 그 모양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병원에 가 보자고 했으나 아내는 막무가내로 도리질을 쳤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애만 탔다. 그러다가 겨우 진정되는 기미를 보인 것은 점심때쯤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아내는 온 방 안을 기다시피 하며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그런데 진찰 결과 아무런 탈이 없다는 게 아닌가. 나는 헛걸음하는 셈치고 그 후 두어 군데 더 다녀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오니 점심 무렵이었는데 또 전일과 같이 아내의 복통이 멎는 게 아닌가. 희한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롱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침결에 찾아와 점심때가 되면 수그러지는 아내의 복통.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급기야 아내는 이 집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니냐며 나의 팔을 잡아 끌고 1층에 사는 주인 할머니에게 내려갔다. 아내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실직고한 뒤, 혹시 이 집에 귀신의 장난을 불러일으킬 만한 곡절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이에 할머니는 절대로 그럴 만한 일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며, 예방법을 알려줄 테니 한번 써먹어 보라는 것이었다. 즉, 식칼을 머리맡에 두고 자던가, 자신이 갖고 있는 ‘천수경’을 줄 테니 수시로 읽으면 귀신이 얼씬하지 못할 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아내는 친정 쪽에도 알아보았으나 역시 주인 할머니와 똑 같은 대답만 들었다며 어두운 낯빛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나는 밤마다 무서운 가위눌림으로, 아내는 아침마다 찾아오는 원인불명의 복통으로 일신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손을 써야 될지 오리무중이었고, 실낱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 지 보름이나 지났을까, 아내가 퇴근해 오는 내게 화부터 내지 말라며 서둘러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대체 뭐냐고 하니, 내가 극구 싫어하는 점쟁이한테서 점을 보고 왔다며 일단 들어보란다. 느닷없이 찾아온 수수께끼 같은 일에 시달린 나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쟁이의 말인즉 이러했다. 내 친척 쪽으로 누나 뻘 되는 이가 춥고 배고픈 처녀귀신이 되어 구천에 외로이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갓난애였을 때 여간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 살을 전후로 하여 복통으로 고생만 하다가 그 길로 죽고 말았다.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동안은 그의 모친이 잘 돌봐 준 덕택에 별로 아쉬운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세월이 물처럼 흐르다 보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기러기 한평생처럼 어디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게 아닌가.
그러던 중 내가 결혼하게 되자 흔희작약하며 멀다 않고 나를 찾아왔다. 행여 내게서 춥고 배고픔을 면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밝은 대낮엔 내 집 앞의 나무 위에 앉아 햇볕을 쬐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가, 밤 깊어 이슬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내 집에 들어와 자는데 그게 바로 내 꿈속에 나타나는 모습이란다. 사실 누나로서, 결혼까지 한 내게 자신의 알몸을 보인다는 게 여간 낯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몸에 걸칠 옷가지가 하나도 없음을 일깨워 주자니 부득불 그 방법밖에 달리 없다는 것이다.
추위야 그런 식으로 견딜 수 있으나, 굶주림만은 기나긴 세월 속에 누가 챙겨주지 않으니 아직도 면하지 못하고 있단다. 그러한 속사정을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자, 결국 내 아내에게 달라붙어 복통을 안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나를 빼앗긴 여성 본능의 시새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몰라 주는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죽기 전에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현재 겪고 있는 배고픔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내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지가지없는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우리 부부가 합심하여 속히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서둘러 액막이를 하지 않으면 미구에 이보다 더 큰 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혀를 끌끌 차기까지 했단다. 그러면서 참말로 귀신치고는 너무도 아름답다, 숱한 점을 봐 왔지만 이런 절세미인 같은 귀신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연가미연가하면서도 왜 쓸데없는 일에 공을 들이는가,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발끈 성을 내며 아내를 나무랐다. 그러자 아내는 오죽 답답했으면 거길 갔겠느냐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거리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언제까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당하기만 할 거냐고 앵돌아앉으며 훌쩍거렸다. 명색이 남편인 내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그저 수수방관하고만 있으니 야속하게 느끼는 모양 같았다.
그 후에도 아내는 다른 점쟁이한테 가 보았노라고 전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앞서 찾아갔던 점쟁이와 똑 같은 말을 들었다는 게 아닌가. 아내는 그게 참 신기하다고 혀를 내두르며, 나더러 인천에 계신 어머니에게 속히 알아보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나는 언성을 높이며, 그건 우연의 일치이거나 그들이 다 짜고 하는 짓이라고 일축해버렸다. 당시는 점쟁이란 말만 나오면 이상하게도 신경이 곤두설 만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기독교에서 우상 숭배가 금물이듯이 점쟁이의 말이라면 그저 황당 무계 하여 믿을 게 못 된다고 매도하는 것을 능사로 했다.
이런 나의 차가운 반응에 참다 못한 아내는 급기야 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단다. 저간에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을 낱낱이 털어놓은 뒤, 과연 친척 중에 어려서 죽은 처녀귀신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처음에 의아해 하며, 그 애가 이제껏 가만 있다가 왜 새퉁스럽게 나타나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다소 언짢아 하시더란다. 그러면서 참척(慘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나와는 육촌간이 되는 그 누나는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예쁘기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을 말씀하신 뒤, 안타깝게도 열 두어 살 무렵에 복통으로 고생, 고생하다가 그만 눈을 감았다고 들려주셨다는 게 아닌가. 아내는 그것을 전하며 아무래도 굿을 해야 할 판 같다고 사뭇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나는 할말을 잊은 채 우두커니 천정만 쳐다보았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그런 불가해한 일이 허다한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두 점쟁이의 말과 어머니의 말씀이 마치 아귀가 맞는 집처럼 거의 일치하지 않는가. 사전에 서로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신적인 일이라면 손사래를 칠 만큼 배타적인 나였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이르러선 처녀귀신의 짓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오래도록 고수해왔던 내 편견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곤혹스럽게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점점 무엇에 홀리는 듯했다. 아니, 갑자기 멍청이나 바보가 된 것같이 느껴졌다.
그 누나가 죽은 곳은 내 고향 ‘거제도’라고 했다. 나로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그곳에서 죽은 귀신이 어떻게 강릉에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사람이 죽으면 넋이 구천에 떠돈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흔히들 장례를 치른 후 망자(亡者)의 넋이 극락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칠칠재(七七齋, 사십구일재)’나 ‘백일재(百日齋)’를 드리는 것도 다 일리가 있는 듯싶었다. 마침내 나는 태연히 귓불만 만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아내에게 던진 말은 시큰둥하게 굿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미온적인 태도에 아내는 눈을 흘기며, 어째 당신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남의 일처럼 여기느냐고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이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라고 내게 일침을 놓았다. 아내가 판단하기엔 귀신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모양 같았다.
다음날 아침, 아내는 맨 처음 찾아갔던 점쟁이한테 액막이할 절차를 물으러 갔단다. 우선 좋은 날을 택한 뒤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정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시장에 가서 점쟁이가 조목조목 일러준 대로 추위에 떠는 처녀귀신을 위해 속내의를 비롯한 몇 벌의 옷을 샀다. 며칠 후 드디어 점쟁이가 주선해 준, 영험이 있다는 무당과 함께 남대천변으로 나갔다. 옷들을 불사르고, 처녀귀신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당일에 장만한 음식을 공중에 뿌리는 위령제를 치렀다. 그것을 내가 안 것은 그 날 저녁이었으니 아내는 그 일을 내게 시치미를 뚝 떼고 암암리에 추진해 왔던 것이다. 아내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임의로 한 것을 고깝게 여기지 말라며, 어찌 되었든 자신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으니 일단 두고 보자는 게 아닌가. 이에 나는 쓰다, 달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히 왈가왈부했다가 아내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하리란 우려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액막이를 한 탓일까, 그 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기이하게도 육촌 누나는 더 이상 내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단잠을 잘 수 있어 아침에 일어나도 몸이 한결 개운했다. 더구나 그토록 애간장을 태우던 아내의 복통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내와 나는 흡사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되찾은 기쁨과 평안에 우리는 그제서야 신혼다운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게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왜 처녀귀신이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의 모습으로 내 좌우에 누웠었는가 하는 점이다. 점쟁이의 풀이로는 아내와 나 사이의 금슬을 시샘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엔 사뭇 수긍이 갔다. 왜냐하면 그들의 표정이 너무도 엄숙했고, 나를 해코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상당히 오래도록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되었다. 점쟁이의 말대로 누나가 춥고 배고픈 귀신이었다면 기력이 거의 탈진된 상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와 같은 상태로 어찌 나를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힘이 부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니 그런 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게라고 말이다. 물론 이것도 아직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앞으로 더 생각해 볼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아내의 임신이 상당히 늦춰졌다는 점이다. 결혼한 지 7개월쯤 되어서야 아내는 애를 가졌다. 물론 우리 부부가 애를 의도적으로 늦게 갖자고 합의한 적도 없었다. 아내는 임신하기 전까지 나보다도 더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농사 일을 거들어주려고 친정에 자주 드나들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애기 소식을 묻기 때문이었다. 아직 없어요, 곧 생기겠지요 하며 대답할 때마다 속으론 정말 자신이 애도 못 낳는 여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더라는 게 아닌가. 나 역시 그의 어두운 표정을 접할 때마다 울적한 심사를 가눌 길 없었다.
좌우간 아내의 임신 소식은 나에게조차 여봐란듯이 어깨가 쭉 펴지는 일이었다. 점쟁이의 말대로 우리가 처녀귀신의 고혼(孤魂)을 달래주었기 망정이지, 한갓 미신으로만 여기고 치성에 게을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아내의 임신은 더더욱 늦춰졌을 테고, 아니할 말로 자식조차 영영 낳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조차 끼칠 만큼 무섭고 꺼림칙한 느낌마저 드는 일이다. 그러나 임신이 늦어진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즉, 달리 생각하면 죽은 누나가 우리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자신이 아내에게 안겨 주었던 복통의 자취를 말끔히 가시게 한 뒤에 애가 들어서게 해주려고 뜸을 들였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앞서 밝힌 대로 그 사건을 3년 전에 이웃들에게 들려준 후 얼마 안 있어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물론 사건의 윤곽이야 대강 밝혀졌지만 어머니로부터 보다 더 확실한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즉, 처녀귀신이 된 누나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특히 누나의 집안이 어떠했고, 내 어머니와는 어떤 사이였는지를 말이다.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누나의 집안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계셨다.
누나는 아버지의 사촌형님, 즉 나에겐 당숙이 되는 분의 둘째 딸이었다. 그 집에는 당숙모가 내리 딸만 둘을 낳고 단산(斷産)하시는 바람에 서운하게도 아들이 없었다. 친척 중에서 유독 어머니와 친분이 두터우셨던 당숙모는 누나와 함께 즐겨 우리 집에 놀러 왔단다. 대개의 경우 밤이 늦도록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당숙은 한 마디로 말해서 ‘깎은 선비’로 불릴 만큼 집안 살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단다. 늘 맵시 있는 의복차림으로 나다니길 즐겼고, 농사짓는 일이라면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모내기 철에도 손에 흙을 묻히기가 싫다며 못줄을 잡는 것조차 마다했다는 게 아닌가. 당숙모가 일손이 부족하니 제발 좀 거들어 달라고 아무리 애걸해도 들은 체 만 체했다. 설령 남에게 눈총을 받거나 비웃음을 살지언정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하얀 모시적삼을 빼 입고 소나무 밑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며 부채질이나 하기 일쑤였단다. 따라서 살림은 당숙모에 의해서 애면글면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처녀귀신이 된 육촌 누나는 용모가 남달리 빼어났고, 사람들에게 사근사근 붙임성도 많았단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나를 업어주거나 데리고 놀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쉬워서, 나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면 안 되느냐고 어머니에게 졸라대며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하곤 했다는 것이다. 또 당숙모가 만든 별미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달려와 맛을 보라고 입에 넣어 줄 만큼 인정이 많고 수련했다. 그랬던 누나는 열 두어 살 무렵 배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는 희귀한 병을 얻었다. 무슨 일인지 갖은 약을 써도 영영 듣지를 않았다. 결국 그것으로 오래도록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버렸다는 게 아닌가.
어머니께서는 또 꿈속에서 누나를 만났던 일을 덧붙이셨다. 아내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액막이를 한 지 얼마 후의 일이란다. 어느 외진 산길을 가다가 옷을 곱게 차려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한 누나를 우연히 만났다. 뜻밖의 재회에 어머니는 그의 두 손을 부여잡으며, 네가 웬 일이냐고 물으셨다. 누나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어느 정도 서로의 감정을 추스른 후, 누나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가자며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얼마를 걸었을까. 밤이 이슥하였을 때 누나가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숙모야, 이제 다 왔다, 저 집에 내가 산다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바라보니 대문 앞이 대낮같이 환한, 그야말로 구중궁궐같이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산중에 왜 집 한 채만 외롭게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누나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윤이 나고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집 안에 도는 공기는 겉보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너무도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 대궐 같은 집에 누나 혼자만 사는 것같이 여겨졌다. 게다가 어머니가 손님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대문 쪽으로 나와서 반기지 않음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대청 마루에 올라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안방에 들어서며 어머니는 한동안 얼떨떨했다. 미리 준비한 듯 지금껏 구경하지 못한 진수성찬이 큰 상에 즐비하게 놓여져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그것을 보자 할말을 잊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누나가 수저를 쥐어 줄 때였다. 먼 길을 오느라 시장하실 텐데 어서 맛있게 들라고 누나는 애교를 부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속이 후출했으나 선뜻 구미가 당기지 않으셨단다. 풍성하게 차린 음식이긴 하지만 색깔들이 너무 요란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죽었던 그를 20여 년 만에 상봉한 것이 꿈만 같아 그저 만단 정화만 풀고 싶었다. 하여 음식엔 전혀 입을 대지도 않은 채 마냥 얘기로 꽃을 피우다가 깨셨단다. 어머니는 그때 만일 그 음식을 조금이라도 맛을 보았더라면 필시 좋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게라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무튼 너희들이 애를 써 준 덕택에 그 애가 뒤늦게나마 좋은 데로 시집간 것 같다며 말끝을 흐리시는 게 아닌가.
이와 같이 나는 어머니로부터 육촌 누나에 관련된 얘기를 기대했던 만큼 다 듣고 나자, 마치 짙게 끼었던 안개가 벗어진 듯 속이 후련했다. 또한, 앞이 시원하도록 환하게 트인 평원에 서 있는 기분도 맛보았다. 뿐더러 집에 돌아온 그 날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될 수 있으면 어디 멀리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만 불끈 치솟는 게 아닌가.
귀신에 대해서 조사해보니 몽달귀신, 그 중에서도 처녀귀신이 총각귀신보다 힘이 더 세며 무섭다고 한다. 이유인즉 처녀귀신은 여러 모로 한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운수 불길하게도 누구든지 처녀귀신의 손아귀에 한번 붙들리면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심하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이러고 보면 신혼 초에 우리 부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것도 육촌 누나가 처녀귀신이 된 자신의 서러움의 한풀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내가 결혼하고서도 갓난애였을 때 누나로부터 받은 지극한 사랑을 보답하기는커녕 안중에도 없이 사니 나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좌우간 아내의 도움으로 뒤늦게 좋은 데로 시집갔을 거라는 어머니의 풀이로나마 위안을 삼을 일이다.
이제는 그 사건에 대해서 마무리를 지을 단계에 이르렀다. 내 나름대로 기록에 최선을 다하느라 했다. 향후 어떤 감상이 동하여서 이 글을 더 보충하거나 수정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사는 동안 처녀귀신이 된 육촌 누나는 자나깨나 안중인(眼中人)으로 마음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게다. 그리고 누나로부터 한량없이 받았다는 깊디 깊은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아니, 나도 그 사랑 못지않게 남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죽은 그 누나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이따금 길을 가다가 먼산을 바라볼 때마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 육촌 누나의 모습이 환상처럼 잡힐 듯 말 듯 한다. 언젠가 나도 죽어서 그를 만나게 되리라. 그때 나는 어떤 식으로 누나의 가슴에 안길지, 아니면 누나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업어 달라고 어리광이나 부리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그때 누나는 나를 어떻게 대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과연 그날이 언제일지 …….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때때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에 젖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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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글이 옆으로 늘어지고 보기가 어려워 이거 작가의 의향도 안 물어보고 글 좀 조정하겠네..양해해주게.. 복사해서 올기다 보면 이런 결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