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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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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우울하고 소름이 끼치는 사건이나 소식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접하는 살인, 강간, 폭력, 사기, 절도, 공금횡령, 정치적 음해나 중상모략, 뇌물 수수 등등엔 여간 입맛이 쓰지 않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범죄 사건들에 우리의 눈과 귀는 피곤하고 가슴마저 답답하다.
매스컴은 어째서 이와 같은 것들만 판에 박은 듯 단골 메뉴처럼 다루기에 혈안이지 모르겠다. 서민들의 심금을 울릴 만한 훈훈한 미담 사례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이들의 모습과 같은 기사거리가 그리도 없단 말인가. 마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시청자나 독자가 없다는 투로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소개하니 그 속내가 자못 의심스럽다.
세상이 갈수록 점점 메마르고 혼탁해지는 것도 매스컴이 이를 한껏 부추기고 있지 않나 싶다. 따라서 이젠 자식들과 함께 뉴스를 보기조차 민망스럽다. 까닭인즉 그들에게 무엇 하나 자랑스럽게 안겨 줄 희망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그런 현상에 나도 공범자인 것 같아 때로는 자책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언젠가 아내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절친한 이웃의 한 아주머니의 귀중한 목숨이 오고 갈 만큼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던 체험담이다. 아직 확실하게 결말은 나지 않았단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이웃간에 석연치 않은 주차 문제가 개입되어 발생한 것으로 추측이 간다는 것이다. 세상이 왜 이리 험악해졌는지 모르겠다고 아주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몸서리를 치기까지 했단다. 나 역시 그것을 전해 듣고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내막인즉 이러했다. 며칠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노후한 지붕의 물받이 보수 공사가 있었다. 시멘트를 바르는 인부들을 위해 대형 크레인이 동원되었다. 각 동마다 돌아가면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주차 문제로 주민들이 상당한 불편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가용 4, 5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그 중장비가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업을 하지 않는 밤에도 그것은 다른 데로 이동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주차의 불편 때문에 그 공사를 중단하라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터에 하루는 그 아주머니가 차로 외출했다가 밤늦게 귀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제의 크레인이 그날 따라 자신이 사는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따라서 자신의 차가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전혀 없어 난감했다.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다행히 이웃 아파트에 주차할 공간이 눈에 띄었다. 하여 급한 김에 차를 그 곳에 대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튿날 오전,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갈 때였다. 집에서 불과 2, 3백 미터도 못 가서 별안간 차가 슬금슬금 내려앉는 게 아닌가. 그것도 차량 소통이 제법 있는 도로 한복판에서 말이다. 순간, 아주머니는 눈 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꽉 움켜 쥐었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행으로 아주머니에겐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없었거나 비켜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마치 천당에서 지옥에라도 갔다 온 듯하단다. 결국 차는 견인되어 정비업소에 가서 타이어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말았다.
좌우간 인명사고 하나 없이 사건은 깨끗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유인즉 정비업소 직원의 말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송곳 같은 것으로 흠집을 내지 않고서야 교체한 지가 한 달도 안된 멀쩡한 타이어가 그리 쉽게 바람이 빠질 수가 있느냐는 게 아닌가. 이러고 보면 아무래도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에 주차했던 아파트 사람들 중 누군가의 소행으로 의심이 간다고 아주머니는 털어놓았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아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와 같이 황당하게 피해를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하여 파출소에 신고를 해 두기까지 했으나 누구의 짓인지 좀체 꼬리가 잡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사람의 생명마저 앗아가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사실 아파트에서의 주차 시비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때로는 감정이 격해지면 폭력조차 불사한다니 씁쓸하기 짝없다. 그 아주머니 역시 말로만 듣던 그런 일이 정작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몸 둘 바를 몰랐다. 다행히 목숨만이라도 온전하게 건진 게 어디냐며 쓸쓸히 웃으며 말끝을 흐리고 말았지만.
비단 주차 시비 문제뿐이랴. 요즈음 세상은 구석구석에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남이야 어찌 되든지 나만 좋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더러운 심보가 활개를 치는 추세다. 속임수와 목전의 이익을 탐하려는 거짓말이 곳곳에 난무하고, 뒷골목의 주먹 세계에서나 쓰일 더러운 욕설이 버젓이 판을 친다. 목소리가 큰 자나 돈 있는 자가 득세하며 으스대는 꼴불견의 세상. 인륜도 안중에 없을 뿐더러 겸손과 온유는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런 덕성을 지닌 자를 조롱하고 깔보기조차 한다. 때로는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해야 올바른 처세인 양으로 여기는 판국이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왜냐하면 괜한 정의감에 불타서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간 무슨 봉변을 어떻게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따금 뜻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에서 더불어 잘 살자고 구호를 외치기는 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용수철이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꼴처럼 구두선이나 공염불로 그치기가 일쑤인 것도 일리가 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남을 깔고 뭉개야 자신이 살아 남는다는 비열하기 짝없는 논리가 사회 구석구석에 성행하고 있으니 어디 쉽게 먹혀 들겠는가. 대체 우리 사회는 어디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가. 흡사 바람이 잔뜩 들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을 대하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성경엔 예수가 믿음이 약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손수 씻기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을 다 마친 후 예수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3장 14절로 15절에 나오는 얘기다.
이는 마태복음 23장 39절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발을 씻기는 것은 주인을 위해 하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주요, 구세주인 예수가 그것을 행한 것은 제자들에게 겸손의 덕을 실행하라고 가르치기 위함이며, 참된 선행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모범으로 보인 듯싶다. 하지만 그런 상생의 원리가 날로 냉대를 받고 있는 요즈음의 현실이 사뭇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언제 우리 사회에도 서로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질 수 있을까.
(2001년 11월)
댓글목록 0
오윤제님의 댓글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들이 풍성했으면 합니다. 봉사는 못 하지만
윤인문님의 댓글
그전에 아파트에선 서로 우리 통로 라인의 이웃집 사람끼리 가끔 어울려 술한잔도 했는데 지금 사는 아파트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니..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을 느낍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참된 선행으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겠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