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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기행5 : 실크로드의 중심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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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하여 주로 타쉬켄트에서 생활하다보니 좀 지루한감이 있어 타쉬켄트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에 있는 사마르칸트을 관광하고자 호텔에서 아침6시에 일어나 서둘렀다. 타쉬켄트 역에서 7시반에 출발하는 사마르칸트 기차를 타기 위해서다. 이날은 세종한글학교 허교장이 바쁜 일정이 있어 관광안내로 한글학교 고려인 여교사와 우즈베키스탄 대학 한국어과 3학년이며 한글학교 학생인 고려인 여학생을 붙여주어 호텔로비에서부터 같이 출발하였다. 호텔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타쉬켄트역에 도착하여 사마르칸트로 이동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열차 내부는 우리 열차와는 구조가 달랐으며 한칸에 6명씩 앉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차이와 과자,빵, 콜라를 무료로 나누어준다. 사마르칸트로 가면서 차창밖을 보니 황무지와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열차를 타고가면서 여교사로부터 사마르칸트의 역사와 정보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얘기인즉 사마르칸트만큼 실크로드의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이름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마르칸트는 아틀란티스(Atlantis)처럼 신비로운 것이며 팀북투(Timbuktoo)처럼 멀리 떨어진 전설적인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웅장하고 보다 큰 생생한 기념비인 사마르칸트에서 총천연색 시장과 길고 풍부한 역사가 특이한 형태의 마술같이 작용하고 있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서 고대 호레즘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5세기경 제라프샨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인들은 오아시스가 있는 아프라시아프 언덕에서 도시를 건설했다. 그후사마르칸트는 수많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원전 4세기), 아랍인의 침략에 의해 세워진 사라센제국(8세기), 칭기즈칸의 침략(13세기) 등으로 이 도시의 주인공은 바뀌었다. 14세기에는 티무르 왕조가 몽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사마르칸트를 다시 부활시켰다. 티무르는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원정을 떠나면 닥치는대로 그 지역의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끌고 와 아름다운 도시로 꾸미도록 지시했다. 특히 그는 푸른색을 좋아해 사마르칸트를 푸른 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사마르칸트를 '푸른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도시 곳곳에 산재한 중세 모스크와 왕족들의 묘들이 저마다 푸른색 돔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푸른색은 청록 빛깔의 터키석 장식이 연출해 내는 신비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사마르칸트를 '동방세계 이슬람의 진주'로 불렀다.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유명한 대부분의 유적들은 14, 15세기에 사마르칸트를 중앙아시아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만든 티무르와 그의 손자 울루그벡, 우즈벡 샤이바니드인의 작품이다. 거의 모든 명소가 그 구조가 옛날과 다르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구시가에 위치하고 있다. 사마르칸트의 자랑거리이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은 수많은 마졸리카 도자기, 담청색 모자이크, 거대하고 아름답게 분할된 공간을 제공하는 메드레사를 가리는 웅장한 종합작품인 레기스탄(Registan)이다. 옆에 있는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있는 비비-하님 모스크사원은 티무르 제국의 보석같은 곳이었으며 황폐하더라도 힘이 넘치고 빈틈이 없다. 이 사원은 이슬람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하나였으며 한계상황까지 건설기술을 추진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웅장함에 희생되어 수세기동안 서서히 기울어져 1897년 지진으로 마침내 붕괴되고 말았다 한다.
3시간반정도의 시간을 걸려 사마르칸트역에 도착, 역사를 나오니 관광지 안내 차량 호객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적당한 가격으로 흥정..봉고차르 렌트한 후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관광지 레기스탄광장을 찾았다.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히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며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의미한다. 메드레세는 신학과 함께 천문학,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기스탄에서는 과거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가 열렸다. 이 광장은 15세기 및 17세기에 두개가 더 증축되어 이슬람 종교 건축물인 울르그벡 메드레세(좌), 시르도르 메드레세(우), 티라카리 메드레세(중앙)에 둘러 쌓여 있다. 현재도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매년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여는데, 여기서 티무르 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있다한다. 여기를 둘러보면서 아쉽다 생각한건 이 중요한 문화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학교 안에는 모두 장사치들이 들어앉아 맘대로 구조를 변경하여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밖에는 귀찮을 정도로 아이,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구걸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린 아기를 안고있는 여인이 계속 구걸하며 따라 다니길래 불쌍해 보여 1불을 쥐어주었더니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저마다 달라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의 어린 시절 미군트럭을 쫓아가면서 껌좀 달라고 외치던 뼈아픈 추억이 생각났다. 근데 여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을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이 나라는 이런 관광자원에 투자할 여력이 없어보여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다음 찾은 '지배자의 묘'라는 의미의 구르에미르 영묘...티무르 왕이 1404년 손자(마흐무트 술탄)의 전사를 추도하기 위해 지은 청색의 중세건축 양식의 사원 건물로서 티무르 일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티무르는 스승을 존중하여 자신의 묘보다 스승의 묘를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였는데, 이에 따라 구르에미르에서 제일 큰 묘는 티무르 스승의 묘이다. 돔의 하부 벽에는 코란의 문구가 문양화되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푸른 타일로 화려한 모양이 장식된 돔은 64개의 나무가 내장되어 골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로로 무수한 흠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돔의 축조 기술은 티무르 시대에 창조되었으며 사마르칸트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묘의 내부에는 티무르 자신과 아들, 손자 및 스승과 당시 지도자들의 석관이 있다. 티무르의 묘는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흑녹색을 띄고 있다. 유해의 머리는 모두 메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해들은 돔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비비하님 마스지드(모스크)... 비비 하님은 티무르의 8명 아내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비비 하님을 위해 짓도록 했다는 이 모스크는 티무르 사후 3년째 완성됐기 때문에 정작 티무르 자신은 이 장엄한 예술품을 보지 못했다. 현재 과거 파괴된 부분을 개보수하고 복구작업에 들어가 있는데, 재정 지원이 되지 않아서 완공 일자가 늦추어지고 있다한다. 여기서 티무르 왕조의 그당시 영광스러웠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차로 이동 울르그벡 천문대를 찾았다. 이 천문대는 1428-1429년에 걸쳐 티무르 손자인 울르그벡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그의 사후 내분에 의해 일부분이 붕괴되었다. 현재 천문대의 기본 골격과 6각형 천체관측기의 지하 부분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높이 40m의 관측 돔이 있었다. 태양, 달, 행성의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지구의 위치, 시간을 결정하였으며, 당시 측정한 1년은 실제 기간과 1분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고 한다. 울르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자 위대한 학자, 천문가, 정치가였다. 특히 그가 이룩한 천문학적인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한다. 울루그벡이 세웠던 천문대는 20세기 들어 발굴됐는데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별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를 통해 놀랄 만큼 정밀한 천문관측이 이뤄졌으며 이 성과는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현군 울루그벡이 암살당한 이유가 이같은 그의 학문중시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못참는 승려들의 사주를 받은 그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르칸트 관광중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아프라시아프 박물관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역사적 교류의 증거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아프라시아프 벽화다. 1975년에 알리바움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과학원에서 발굴 보고서 '아프라시아프 벽화'을 발표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아프라시아프 벽화를 고증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의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벽화 에 여기온 사신 두 명의 그림이 있는데 그들의 복장과 새깃털이 꽂힌 머리 장식을 보고 이들의 국적을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의 권위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 바 있지만, 박물관의 벽화 복사본에 선명하게 표시된 ‘Corean’이란 글씨를 보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6세기쯤에 고구려가 넓디넓은 중국의 강역을 넘어 사마르칸드 지역과 교통했다니... 그러니까 실크로드의 동방 기착지는 한반도가 아닌가... 그 당시 한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왕래를 했다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사건이다. 한국의 고려시대는 국제무역이 매우 발달하여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를 나오면서 우리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숙소가 있는 타쉬켄트로 가기위해 사마르칸트역으로 향했다.
사진1 : 사마르칸트행 열차 내부
사진2 : 1칸에 6명식 앉는 열차 좌석
사진3 : 차창밖으로 본 풍경
사진4 : 레기스탄 광장
사진5 : 황금으로 장식한 메드레세 내부 천장
사진6 : 구미에미르 영묘 입구에서
사진7 : 구미에미르 영묘내부의 티무르와 스승, 그리고 가족들의 석관
사진8 : 비비하님 모스크
사진9 : 레기스탄광장에서 우즈벡 경찰과 함께
사진10 : 울루그벡 천문대 내부
♬배경음악:Nicos / Kalini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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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님의 댓글
권력이란 찾이하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네요. 을루그벡이 그렇고 ㅅ
시이저가 그렇고 고려의 왕들. 고구려 사신이 새겨 있는 벽화를 곁들였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찍지 못하게 하나요?
윤인문님의 댓글
박물관안에서는 사진을 못찍게 합니다. 윤제형님 말씀대로 사진을 올리려고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죄송합니다.
박철주님의 댓글
세계사 공부 잘 하였습니다. 책보다도 자세한 사진과 훌륭한 설명 아주 잘 보았습니다.
생방송을 대하니 벽화가 살아 움직이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벽화가 세계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군요. 미술의 힘은 대단합니다. 알렉산더대왕의 후예들도 그곳에 있나요? Corean도 다녀갔고. 그러면,혹시 사마르칸트가 국제도시입니까?
윤인문님의 댓글
사마르칸트는 14세기, 티무르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발전했으며, 지금은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로 성장했지요. 기원전 4세기 무렵, 세계 정복을 꿈꾸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사마르칸트는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아마 우즈벡은 다민족 국가이기때문에 분명 알렉산더 후예들이 있겠지요
윤인문님의 댓글
사마르칸트의 부흥은 14세기 무렵 몽골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출현한 티무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칭기스칸의 뒤를 이어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자신이 새로이 건설한 제국의 수도로 정했고 이후 15세기까지 이 도시는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서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으나 지금은 인구 40만의 문화유산도시입니다.
차안수님의 댓글
2005년도 다녀온 기억이 새롭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사마르칸트는 아라비아양식의 건축과 문양이 새롭군요. 티무르왕조의 수도로써 지금은 문화유산이 남겨진 40만의 도시라니 우주벡의 제2도시 답군요.
인문형님덕에 세계의 문화유적지를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박철주님의 댓글
아,문화유산 도시군요.정말 좋은데 다녀오셨습니다.풍부한 지식으로 다녔으니 알찬 여행이 되었겠습니다.부럽습니다.나이가 드니 史學에 관심이 더욱 깊어집니다.
늦은 밤입니다.편안히 주무시고 좋은 내일 맞이 하십시요.
지민구님의 댓글
소련 연방에서 각 민족 분리후 역사유산이 더 잘 보존되는 느낌도 드네요...
윤인문님의 댓글
환쇠형님은 인천에 올라오신 건지 아직 소식이 없네요..???..그리고 신변방에서 태희님 뵌지도 꽤 오래됐네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신변방에 태희님 오시면 나도 신고할람니다..이젠 떠오르는태양..70회 쇠(鐵:쇠철)주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