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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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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왜 그럴까.
요즈음 갑자기 아버지란 단어만 나오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왜 그럴까.
아버지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짧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것이다.
정강이에 살이 홀쭉한 것을 보아도 눈물이 글썽이고 얼굴에 검은 점들이 수북이 난 것을 보아도 눈물이 맺힌다.
앞머리가 훤하고 남아있는 머리칼이 모두 희어진 것을 보아도 눈물이 돈다. 예전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도 늙었는가. 하나둘 머리가 빠지면서 함께한 살림살이,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었다.
언제이었던가, 할아버지 제삿날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불쑥 꺼낸 이야기는 칠촌 아저씨와 시비가 붙고 급기야 어머니도 합세한 입씨름이 애초부터 말의 요령에 밀리니 급기야 아들의 구원을 요청하는 눈짓을 보낸다.
나까지 합세한다면 집안싸움으로 번질 것이기에 나는 아버지께 물러서기를 권유하였다.
분명 아버지는 할 이야기를 하셨지만 모든 시시비비는 때와 장소가 있는 것 지금의 자리에서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장소를 잘못 선택하신 이유로 나는 아버지를 외면하였고 어쩔 수 없이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그날에 돌아오면서 어머니의 서운한 눈빛 두고두고 남아있고 아버지의 풀리지 않는 성은 돌아와서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거드는 척이나 할 것을 하는 후회와 함께 우리는 며칠을 말없이 지내야 하였다.
나이가 들면 어린이가 되는 것 싸우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 시절을 나는 잊고 아버지는 다시 찾은 것이다.
4남매를 두신 아버지는 자식들과의 대화가 별로 없으셨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자고 시간외 일을 하시고 돌아올 때에는 우리는 벌써 자고 있었으니 하고 싶은 말도 전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하시어 돌아오실 때가 많았는데 그때는 우리는 자고 있었고 간혹 잠들지 않았더라도 잠자는 시늉을 하여야 했다.
한두 번 깨어 있을 때 우리 형제에게 하시는 말씀은 훈계이고 당부이었겠지만 듣고 있는 우리는 곤욕 중의 곤욕이 되었다.
하신 말을 되풀이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기엔 우리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커다란 아버지의 목소리도 무서웠을 뿐 아니라 당부하시는 말씀 자체를 받아드리기에는 아직 나이가 모자랐다.
아버지가 무섭다고 느낀 것은 벌써 부터였다.
그 무서움을 처음 느낀 것은 아버지가 시내에 볼일을 보시고 돌아온 버스 정류장에서 맞이하였다.
늦은 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은 오로지 얼마나 많은 과자를 사가지고 오시는가에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아버님은 얼큰히 취하시어 기분마저 좋은 것 같아 얼른 손에 드신 물건을 받아 들었다.
들고 계신 것을 받아 살펴보니 내가 기대하던 과자나 사탕은 없었기에 ‘아버지 과자는 없어요?’ 나는 여쭈어 보았고 아버지는 갑자기 버럭 성을 내셨다.
그때의 기억은 아버지께서 성을 내셨다는 기억 뿐 그 이외의 일들이 기억에 없다.
분명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그때의 일을 지금에 여쭌다면 분명 아버지는 기억에 없을 터이니 만약 그 일을 기억이라도 하게 된다면 오히려 미안해하실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아버지가 무서워 얼른 아버지를 대하면 얼굴을 보며 기분을 살피곤 하였다.
대체로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별로 간섭을 하지 않으셨지만 어릴 때에는 그냥 무서워 귀가할 시간이 닦아오면 슬며시 잠자리로 들어가곤 했다.
자는 아들을 깨워서 까지 훈계하거나 교육시킬 아버지는 아니시니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무서웠던 시절을 넘겼다.
함께 어울려 주시지는 못하셨더라도 지금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버지도 사랑은 있었다.
소학교에 입학할 즈음 사다주신 가죽가방은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고 세발자전거는 동네에서 가장 튼튼한 것이었다.
손수 만드신 자전거는 잘 굴러가서 어느 누구와 시합을 해도 지지 않았다.
굴러가는 바퀴가 훨씬 크니 단번에 달릴 수 있던 것이다.
중학교 합격자 발표 날이었을 것이다. 아버님은 회사에 휴가를 내시고 처음으로 나와 함께 학교에 오셨다.
기분이 좋으신지 함께 들른 음식점에서 만둣국을 사주셨는데 나는 만둣국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처음 먹어보는 만둣국은 겨울 추위를 단숨에 녹이는 것이다.
그날이었는지 또 다른 날에 함께 온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애관극장이었던가 키네마 극장에서 영화 한편 본 것도 기억이 난다. 아기 코끼리 걸음마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하타리라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 코끼리의 앙증맞은 모습에 보던 사람들이 편히 웃던 모습이 보인다.
걸음걸이를 끝내고 이제 도약하려는 나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신 아버님의 의도는 별 뜻이야 없었겠지만 어미 코끼리의 보호아래 걸음을 배우며 성장하는 아기 코끼리를 보고 그 때에 느끼지 못한 감정을 오늘에 와서 느낀다.
지방근무로 진해에 내려가셨을 적에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찾아뵈올 때에도 반가운 기색은 않으셨다.
탑산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제황산공원에 데리고 가서 진해탑 밑에서 사진을 찍어주시던 아버지는 아내와 약혼하고 찾은 여수에서도 오동도를 구경시켜 주시고 장래의 며느리를 위하여 전복죽을 사주셨다.
사랑을 은근히 나누어 주던 아버지는 늙으시고 나도 벌써 육십을 바라본다. 아들에 쏟던 정성이 양계하시던 당신의 삶의 터 닭장 안에서 병아리 쫓던 내 아들, 당신의 손자에 옮기고 그 손자 할아버지를 벌써 외면하니 그 모습 쓸쓸하시다.
어렵게 분양받은 아파트 터 닦을 때부터 3년 내내 어머니와 함께 둘러보시며 좋아하시던 모습을 흔들어 놓을까봐 차마 말 못하고 미루고 있다가 남에게 전세 주었다 하였을 때 실망하시던 눈빛도 쓸쓸하다. 작년 이맘에 야구장에 들러 함께 관전하고 아직 가지 못하였는데 가까운 시일에 그 시원한 맥주 얻어먹고 냉면 한 그릇 사들여야지 하는 마음은 마음일 뿐 언제 갈지도 모른 체 여름이 가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가고자 귀하게 얻은 전 게임을 모두 볼 수 있는 티켓이 지갑 속에서 울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들을 잡고 오늘도 장기 한판 두자고 애걸하신다.
세 번 중에 한 번을 이길까 말까한 시합을 오늘도 하자 신다.
거절할 수 없어 두는 장기시합은 어느덧 항우와 유방이 된다.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다툼이 끝나면 시무룩해지시는 아버지가 오늘은 환한 웃음을 짓는다.
매일 이렇게 하면 효도를 하는 것인데 이런 쉬운 일도 못하고 있으니 아들은 항상 아들로 남아 있는가 보다.
댓글목록 0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저도 아버님한테..야구미트질/바둑/장기..배웠는데..벌서 올해가 31주기입니다..제취직하고 3개월만에..『이젠 살만한데 가는구먼..』마지막 말씀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윤제님의 댓글
며느님, 아니 제수씨는 보시고 떠나셨는지 모르겠네요. "살만한데 가는구먼 하신"하신 말씀 허무하지만 당신은 효자임을 암시하네요.
윤인문974회)님의 댓글
오늘 윤제형님이 저의 10년전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나게 하시는군요..저도 아버님과 장기둘 때 저에게 절대 지지않으시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음껏 효도 못해드린 것이 후회가 됩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아버지와의 추억을 진솔하게 펼쳐주신 선배님의 마음이 효자임을 알게 합니다.
가급적 아버지와의 시간을 가지시려는 모습, 장기를 두시는 두분 사이에 끈끈한 父情을
느껴봅니다. 마음을 따스하게 덥혀주시는 글에 감사드립니다.
오윤제(69회)님의 댓글
일전에 포도봉지를 씨우며 사촌 처남 엿달 전 어머님을 여의고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 하더군요. 잘 않되더라구요.
안남헌님의 댓글
아버지랑 장기둬본지가 언젠지!!! 이번주말엔 아버지랑 장기한판 두어야 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