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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를 내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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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를 내는 여인
합창단은 개성을 극도로 자제하는 단체 중 하나일 것이다.
제복이 그 증거이다.
제복은 누가 누구인줄 모르게 한다.
옷이 같으니 얼굴도 비슷하여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보인다. 옷만 같은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성량으로, 같은 음색으로 성량과 음색을 합하여 맞출 때 합창은 살아나고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휘자가 휘젓는 손끝에서 나오는 강하고 약한 동작에 따라 자신의 음을 강하게 또는 여리게 내어 놓으면 족한 것이다.
거기에 和音이 모이어 흐르는 것이고 그런 화음을 듣고자 사람들은 조용히 경청하는 것이다.
합치어진 화음은 웅장하여져서 귀가 터질 것 같은 천둥소리도 내지만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내어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듣지 못할 여린 소리도 낸다.
한 번 듣고 사라지는 음이라도 아름다운 음이면 길게 여운이 남아 있어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으니 우리는 앙코르를 청한다.
한가한 날에는 이런 화음이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매일 듣고 싶었겠으나 그런 사치를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애초부터 싹을 잘라버리고 오늘을 살고 있다.
어제는 어느 모임에 다녀와서 받은 쇼핑백을 정리하던 아내가 우리 여기 가봅시다 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어딜 가느냐 물었더니 문예회관에서 인천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가 있으니 가보자고 한다.
오랜만에 아내의 부탁이고 돈 드는 일도 아닌 것이기에 시간을 기다려 함께 나섰다.
막이 열리니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검은 색깔의 연미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와 정오를 맞추어 정렬하고 인사를 한다.
합창단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길렀음인지 머리를 뒤로 매어 모두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오페라합창 하이라이트라 한 첫 순서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가 달콤한 향기를 내며 지나가고 연이어 <대장간의 합창>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른다.
<오렌지.......>만 제외하면 베르디를 위한 합창을 하는 것 같다.
모든 곡들이 한두 번 들은 기억이 있는 유명한 곡이다.
노래들은 비교적 길지 않으니 대곡을 들을 때의 따분함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나나 무스끄르가 번안하여 불렀던 기억도 있어 친근함이 더 한다.
그 처량한 노예 신세에서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해방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그 음색에도 담겨 있는 듯 슬프다.
이러한 아름다운 화음은 아니지만 일요일 마다 교회에서도 합창은 들을 수가 있다.
교회에 가는 목적이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이지만 합창을 듣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친교에 서투른 나는 성가대원의 면면을 자세히 모른다.
특별한 사람이라면 모르되 성가대에서 합창만 하는 사람이라면 마주할 기회는 없는 것이다.
예배 가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나지 않는다하지만 성가대에 앉아 있는 대원들의 얼굴은 세월과 함께 대충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음을 거의 같은 색과 톤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얼굴을 살피게 되니 하나둘 성가대원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얼굴이야 다르다 하지만 그 표정은 정말 비슷하다.
같은 노래를 같은 마음으로 부르니 그럴 것이다.
테너 파트는 목소리를 높여야 하기에 고개를 쳐들게 마련이고 베이스 파트는 음성을 깔아야 하니 얼굴이 자연히 내려갈 것이다.
이런 음 내는 동작 이외에는 남자들은 별다른 표정이 없으니 자연 여자들의 표정을 보게 된다.
보통 지휘자를 바라보며 부르기에 여자들 모습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특별이 두 여자는 나의 눈에 들어온다.
티를 내니 그럴 것이다.
티를 의식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니 오히려 그 티가 아름답다고 느껴왔다.
한 여인은 5도 정도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니 티가 나고 한 여인은 노래에 몰입하여 티를 낸다.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전후좌우로 몸을 움직이고 눈 또한 지휘자 손끝을 고정하고 있다.
얼굴에 짓는 밝은 미소는 미인이 아니라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표정에 나오는 음색을 찾으려 나는 애를 쓰지만 언제나 찾지를 못한다.
음악에 밝은 사람들은 잠시 듣고만 있어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 또한 잡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연습하며 티를 없앨 것이다.
수 년 동안 나는 그녀의 모습의 티를 볼망정 음색에서 나오는 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음악 소질로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티를 찾으려는 나의 갈망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어느 날은 티를 내는 여인이 곡 중에 솔로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정 박자야 수년간 그곳에 갈고 닦아 왔으니 잘 하고 있을 테지만 음색에는 어떤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조이고 듣고 있었다.
기름지고 매끄럽고 부드럽고 아름다울 줄 알았던 음색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는 평범한 목소리로 예의 티를 내면서 혼자 부르고 있었다.
합창 중에 솔로로 부르는 음의 색깔도 전체의 색에 맞추어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부르고 있는 여인의 색깔이 본래 이런 색인지 나는 모른다.
밋밋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울릴 때 허무한 생각이 든다.
잔득 기대를 갖고 듣던 내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조수미나 마리아 칼라스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천상의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밋밋한 그 목소리.
실망감이 불현듯 몸으로 스미어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수분이 흘러 함께하는 합창에서도 그 음에는 티가 난다.
나의 귀에도 이제는 그 음색이 보이고 음량도 들린다.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티를 내는 얼굴을 보면서 저 여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며 일요일마다 상상하는 즐거움은 아직도 남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피어난다.
오늘 이후로는 그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은근하게 밀려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얼굴에 티를 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노래의 색깔을 찾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데.......
그 즐거움이 사라지니 아쉬움이 갑자기 파도 되어 밀려온다.
아마 5도 정도 왼편으로 기울이는 여인도 독창을 할 때가 있겠지.
그때를 맞이하면 나는 용감하게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티를 내는 두 연인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댓글목록 0
윤인문님의 댓글
티를 내는 여인..꼭 우리 집사람 얘기하는 것 같군요..전주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합창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남동구 여성합창단 단원,,주안감리교회 성가대원...저도 환쇠형님 같이 팔불출로 변하나 봅니다..ㅋㅋ
李聖鉉님의 댓글
여긴 또 아내자랑!!! 팔불출=티를내는여인
윤용혁님의 댓글
티를 내는 여인이 아름답군요. 자연스런 티는 옥의 티가 아니라 매력이 발산하는
여인의 티군요. 건필하세요.선배님.
오윤제님의 댓글
윤장학관님 사모님 언제 인주옥에 초청하여 고운 노래 들어 보았으면 좋겠네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오늘이 그날 티 내는날...누굴 물고느러지는것도 기술이여..ㅋㅋ
박남호(87)님의 댓글
티하니 전 가수 `티`가 생각나는데 형님들이 아실려나?
괜실히 전도 티한번 내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