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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배네 참외 잘 먹었다.
본문
작열하는 태양,
아침부터 울어 제치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오늘 벌어질 일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 집 앞 소태나무와 감나무를 감싸 떨고 있다.
찜통더위 속에 넙가래밭 흥배네 참외는 군침이 돌도록 아주
노랗게 물들어 황달에 걸려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네 살 터울의 사촌형과 형이 그 집
참외가 밭에서 농익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미소를 머금었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용내뜰을 돌아 둘은 살금살금 참외밭을 향해 접근해 갔다.
군사훈련도 안 받은 놈들이 낮은 포복으로 배를 깔고 밭고랑을
엄폐물 삼아 벌건 대낮에 참외서리에 나선 것이다.
대담한 사촌형은 노랗게 잘 익은 참외만 골라 땄으나 형은
들킬까 겁이나 대충 눈에 들어오는 대로 허겁지겁 따 윗옷의
배가 불룩 나오도록 퍼 담았다.
참외밭 아래에서는 그 집 식구들이 텃밭의 김을 매고 있는데도
둘은 대담하게 서리를 하였고 참외밭에 당당히 초대받은 아이들처럼
배가 나와 윗옷이 터질 듯 뒤뚱거리며 참외를 가지고 바로 옆
잡풀이 우거진 밭두렁 밑으로 향했다.
숨어서 한입 베어 무니 정말 맛이 있었다.
둘은 쥐약을 섞어줘도 아랑곳 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먹어댔다.
배가 불러 곧 터질 것 같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랑살랑 더위를 식혀주고 포만감의 두 아이는
세상을 가진 듯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후회도 없이 마냥 행복해 하였다.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밀려와 형의 눈꺼풀을 덮으려 할 때 사촌형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텃밭에서 일하는 흥배어른을 향해 불쑥 나온 배를 양손으로
두드리며 느닷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흥배네 참외 잘 먹었다! 흥배네 참외 잘 먹었다!”
아니 잘 먹었으면 그만이지 참외 도둑질이 무슨 자랑거리나 된다고 당당히
나서 소리를 높여 외친단 말인가?
당황한 형은 간이 콩알만 해져 뒤도 안 바라보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짝을 짓던 메뚜기도 놀라 이리저리 날고 저편 한가로이 풀을 뜯던
어미 소의 젖을 빨던 송아지는 젖을 놓쳐 “음메!”하며 껑충껑충 뛰었다.
저 만치 배불뚝이 흥배어른이 하던 일을 멈추고 뒤뚱거리며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너 이놈 너 살미 누구 큰아들 아니냐! 거기 서라 이놈아!”
그러나 스모선수 같은 거구의 그 아저씨는 그 아이들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숨이 턱에 차 헐떡거리던 그 분은 “네놈들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분을 삭이며 쫓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날 오후,
예상했던 대로 일은 터지고 말았다.
크게 노하신 큰아버지의 지게작대기 세례를 용케 피해가며
사촌형은 형을 보호하려고 끝까지 단독 범행이었음을 큰아버지께
고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갈 곳이 없자 사촌형은 작은아버지 댁 뒷간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형에게 아까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신호를 보냈다.
“꾀꼴 꾀꼴”
형은 저녁밥을 못 먹은 사촌형을 위해 어머니가 눈치 챌까 조심스레
부엌으로 들어가 가운데 밥솥을 열었다,
깡 보리밥 위에 얼기설기 찐 김치를 올려 뒷간에 숨어있는 사촌형에게 밥을
날랐다.
삼복더위에 뒷간은 그야말로 머리칼이 다 빠질 정도의 형용키 어려운 냄새가
진동하였어도 밥을 받아든 사촌형은 배고픔에 군소리 없이 맨 손가락으로
잘도 밥그릇을 비웠다.
자신을 감싸준 사촌형의 의리가 너무 고마워 재래식 뒷간에서 풍기는 참기
어려운 고향에 냄새를 맡아가며 쪼그리고 앉아 안타까운 눈초리로 사촌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촌형은 킬킬대며 웃었다.
“동생아! 나 괜찮아.”
“괜찮긴? 상거지도 이런 거지는 없다.”라고 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먹을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서리가 시골인정에 의해 어느 정도 용납되었다 해도 파평윤씨 판도공파 교육자
집안에서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 어른들의 격언에 따라 서리도
엄히 다스려지는 불문율이었다.
남들은 서리하다 주인에게 붙들리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형은 붙잡히는 것은
물론 들켜서도 안 되었다.
왜냐면 선생네 애들이 그랬다는 동네소문과 함께 바로 손가락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날 밤 파란 전구를 단 반딧불만이 형과 사촌형의 대책회의에 불을 밝혔고
은하수가 하얗게 뿌려진 여름밤 하늘에는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물며 속절없이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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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74회)님의 댓글
우리의 인고 학창시절..지금도 동창생들이 만나기만 하면 빼놓지 않는 단골메뉴가 야간 자율학습때 학교근처 포도밭 서리를 하다 들켜 혼났던 이야기하며 웃음을 자아내곤 합니다.. 그때는 학교 근처에 포도,배 밭이 널려 있어 친구들과 저녁 디저트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슬그머니 학교 담을 넘곤 했었지요..
윤용혁님의 댓글
ㅎㅎㅎ 포도밭 기억납니다. 서리는 상상도 못했고요. 인문형님이 저희들에게 인수하고 졸업하지 않으신 바람에 몰랐어요. 서리는 추억을 낳지요. 비가 옵니다. 즐거운 날 되세요.
이진호님의 댓글
잊혀져가는 여름 밤의 추억 참외서리..생사를 같이한 전후들은 지금 잘 있는지 모르겠네요???<BR>어릴적 시골 할머니 댁에서 동네 형들하고 몇번 해봤는데 그 스릴 말로 표현이 안됨니다..<BR>훔처먹는 사과 아니 참외가 맛있다했나요ㅋㅋ 선배님 글 잘읽었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진호후배님, 맞아요. 훔쳐먹은 서리의 참외맛 유별났지요.
서리할 때의 긴장과 스릴,공포, 맛의 안도감 ㅎㅎㅎ
여름밤은 그렇게 가고 있지요.
진호후배님, 좋은시간 되세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그날 밤 파란 전구를 단 반딧불만이 형과 사촌형의 대책회의에 불을 밝혔고 은하수가 하얗게 뿌려진 여름밤 하늘에는 별똥별이 ===> 개똥벌레 형(螢)님이 보고싶다..
윤용혁님의 댓글
ㅎㅎㅎ 환성형님, 개똥벌레 형님을 보고싶다 그러시면 안 오시죠. 형설의 공을 쌓으신 형공형님을 보고 싶다 하셔야 오실 것 같군요. 저도 뵙고 싶군요. 재준형님도 뵙고싶구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형설의 공을 쌓으신 형공형님을 보고 싶다 ===> 하면 못알어보신다,.<BR>자연산 狂語 한사라에 쇠주한잔합시다..하면 바로네..
오윤제(69회)님의 댓글
어릴 때 한번쯤 한 서리 커다란 것만 골라 거둔 것이 날참외 일때의 낭패감 다시 들어 갈 수도 없고 쓴 참외를 먹던 기억 새롭내요. 그런 것 조차 못하게 하신 집안 어른들 가르침에 단정하게 성장함을 감사해야겠지요.
윤용혁님의 댓글
환성형님이 형설의 공 형님을 유인하는 방법을 터득하셨군요?ㅎㅎㅎ
윤제형님, 서리의 낭패를 피력하시니 그 당시 일들이 떠 올라 미소짓습니다.
서리도 분명 도둑질임을 강조하시던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