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밀거적
본문
호밀 대를 덧대가며 밀거적을 매시는 아버지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있다.
자귀로 자로 잰 듯 가장자리를 다듬으니 근사한 밀거적이
보송보송 엉덩이를 받혀주며 새롭게 탄생했다.
이제부터 여름밤은 이 밀거적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가끔 수제비 국물을 적시며 두런두런 흘러갈 것이다.
언제 심어져 자랐는지 죽순나무가 여름밤 은하수를 향해
긴 몸통을 자랑하는 가운데 저녁밥을 일찌감치 물리고
그 옆에 아버지가 만드신 둘둘 말린 밀거적을 폈다.
모기를 쫓기 위해 보리타작 후 남은 검불을 태울 때 마다
미처 수거하지 못한 보리가 톡톡 터지며 흰 꽃을 피우다
불길에 재를 남기고 사라지면 모락모락 연기는 구수한
냄새를 가져와 눈과 코를 자극하였다.
누런 코를 여름에도 달고 사는 옆집 시갑이는 훌쩍거리던
코를 후루룩 마시며 벌써 밀거적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골방에 들어가 자려니 한 낮의 열기로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기에 놀러왔지만 실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가져오신 미국 원조용
흰 분말 분유가루를 어머니가 저녁 밥솥에 쪄 낸 노랗고
딱딱하게 굳은 그 것 한 조각을 먹고 싶어 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딱딱한 그것을 공평하게
나눠준 뒤 동생과 팔씨름을 시켰다.
아버지의 공정한 심판으로 동생이 이겼고 내심 아버지는 동생이
이긴 것에 대하여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옆집의 아주머니는 그 광경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댁의 애들은 에비오제 영양제도 먹고 늘 쌀밥을 먹이지만 우리
애들은 보리밥에 고구마만 먹여 늘 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팔씨름 중에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용을 쓰던
그 애의 쌍 바위 골에서 유난히도 비명소리가 엉덩이를 돌아 메아리쳤고
냄새는 스컹크 수준을 넘나들었다.
밀거적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 수많은 별들의 밀어가 수채화 되어
창공을 수놓았고 금가루를 뿌린 듯 휘황찬란하였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쉽게 잘 찾았는데 전갈자리나 오리온자리는 요원하다.
갑자기 별똥하나가 휘익 은하수를 가르며 꼬리를 길게 물며 떨어졌다.
아버지는 밀거적에 얽힌 육이오 사변 체험담을 들려 주셨다.
수차골 용대아버지와 당신의 이야기였다.
마대라는 큰 개를 가지고 진강산과 덕정산의 산짐승을 무수히 잡던
그 분이 구 일오 인천 상륙작전 시 승봉도에서 쫓겨 온 인민군 패잔병
하나를 동네 청년들과 붙들어 허술한 창고에 가뒀는데 그 놈이 탈출하여
이미 강화를 벗어난 인민군 본대에 연락을 취해 재 입성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이 선량한 강화 군민을 잡아들이던 중 그 분도 붙들려 결국
강화군 송해면 바닷가 인해성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한다.
교통수단도 전혀 없던 그 상황에서 아들 둘이 그 집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밀거적에 감싸 지게에 지고 모셔와 뒤뜰 아카시아 밭에
묻었다 한다.
아버지도 이때 바로 그놈들에게 붙들렸다가 열흘 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셨다한다.
그 후로 그 집안은 어찌된 일인지 패가망신 하였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은
흉가가 되어 여름밤 귀신들이 들끓는다고 하였다.
대문과 창문이 나무판자로 단단히 못질해 있어도 밤이면 영락없이
삐꺽 문을 여닫는 소리, 부엌에서 설거지 하는 소리, 비명을 지르며
다투는 소리가 끊임없이 난다는 것이다.
지켜보던 그 집안사람들이 모여 의논 끝에 집을 허물고 돌아가신 그 분의
묘를 이장하기위해 파 보니 냉혈 터에 아카시아 뿌리가 썩지 않고 검게 변한
시신을 칭칭 감아 끔직하였다한다.
놈들에게 참혹하게 당한 주검이라 경황이 없어 묘를 잘못 쓴 것이 화근이라는
것이다.
정말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운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그러면서 수차골 냉 터에는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래 작은 할머니 댁 큰 아들인 오촌아저씨도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셨고 그 바로 옆집의 큰 아들은 대동아 전쟁 중에
일본군으로 끌려가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전사하는 등 좋지 않은 일들만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풍수지리를 맹신하지 않지만 좋지 않다는 곳에 굳이 터를 잡을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고 무조건 명당자리만을 구하려 헤매어도 안 될 것이다.
먼 서편 매당지에 그믐달이 졸음에 겨워 턱을 괠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이야기는 끝났다.
밀거적 앞으로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푸르스름한 빛 서너 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워 홑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가만히 눈만 내밀고 살펴보니
“형설의 공" 중에 하나인 반딧불이었다.
그날따라 반딧불이 무섭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밤이슬이 내려 이제 밀거적을 거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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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101)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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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101)님의 댓글
참으로 기발한 표현도 잘 만드십니다요. ㅋㅋ<br>
쌍 바위 골에서 나오는 비명소리가 엉덩이를 돌아 메아리치다니...ㅋㅋㅋ<br>
요즘은 보리가 쌀보다 2배는 비쌀거예요. <br>
형설의 공 반딧불님 생각이 왜 날까!!! <br>
참 무심도 하셔요....여러사람이 찾아 헤매건만....너무 튕겨...ㅎㅎㅎ
오윤제님의 댓글
돗자리를 깔고 쑥을 피우고 모기를 쫓으며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면 무수한 별들이 하늘에 가득했던 60년대 모습일진대 그 청명한 날에도 가난은 있고 쓸픔은 있었네요. 그놈의 빨갱이가 뭔지. 아 그놈이란 말 나는 쓰지 않을려 했는데 빨갱이에는 그놈이 딱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김태희님, 썬다운이 초저녁 밀거적에 내려 두런두런 귀를 즐겁게 해 줍니다.
맞지요. 요즘 보리밥은 웰빙식품이고 쌀밥은 조금 기피하는 역전현상이 있지요.
신형섭 선배님을 여러 후배들이 반딧불처럼 찾아헤매는 심정을 간파하셨군요?
형섭형님, 재준형님, 모든 것 이해하오니 어서오세요. 인사동 위독, 급 연락요.
윤용혁님의 댓글
윤제형님, 가난은 있었지만 60년대가 정말 인간적으로 가슴에 추억을 새기는군요.공비도 많이 넘어오고 월남전이 한창이고 미국에는 그 여파로 히피족이 유행하며 서서히 남한이
북의 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했죠. 형님, 어쩔 수 없군요. 레드는 싫군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송해영님의 댓글
항상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며 소설을 읽는 착각을 만드는 용혁님의 글솜씨를 되새기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전재수님의 댓글
온식구가 밀거적에 누워 쏟아질것만 같은 별을 보면서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듣다가 비가 쏟아져.. 어둠속을 더듬으며 벽장에 있는 성냥꼴을 꺼내 벽에 붙여놓은 황딱지에 확~ 그은 후 등잔불을 붙이었지요. 어쩜 내 어린시절을 그대로 써내려 갔을까.
전재수님의 댓글
그시절 밤낯으로 짖어대는 대남방송(북한홍보방송)으로 온가족이 항상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살았던 강화 내고향이었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송해영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과찬을 해 주심에 그저 후배는 격려로 알고 선배님과
추억을 나눠 가지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선배님.
윤용혁님의 댓글
전재수 선배님,강화가 고향이시군요? 아주 반갑습니다. 대남방송을 들으셨다면 송해면이나
강화읍 또는 양사면, 교동면이신가요? ㅎㅎㅎ 맞아요. 웅웅거리던 놈들의 확성기, 기억납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군요. 건강하세요.
윤인문님의 댓글
여름날 저녁이면 집앞마당에 밀거적를 깔아놓고 가족모두 둥근 저녁상 주위에 둘러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진우곤님의 댓글
참으로 아리디 아픈 추억을 맛깔스럽게 표현했군요. 늘 고향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글. 고맙군요. 아득한 60년대의 추억을 곱씹을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래도 너나없이 못 살던 때가 더 아기자기했던 것 같지 않나요.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 같은 멋대가리 없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더 운치가 있었던 같이 느껴지네요.
윤용혁님의 댓글
인문형님, 비가 많이 내리네요. 여름날 집앞마당에 밀거적 깔아놓고 둥근밥상을 맞이한
단란한 형님가족애를 훈훈하게 그려봅니다. 눈 앞에 선하게 그려지는군요.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김태희님,아주 정확하시군요.자연사와 변사체인 개죽음을 가릴 때 구분이 바로 가벼운 밀거적이 사용됨을 직시하셨어요.다시한번 인고 가족임을 진하게 느껴봅니다. 7월의 첫 월요일, 하반기 님의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잘 성취되시기를 빕니다. 고운 시간 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우곤 선배님,감사합니다. 수필가이신 형님께서 제 글을 공유하여 주심에 격려로 알고
60년대의 못살던 당시가 그래도 인간적인 운치가 더 있었다는 형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계속 건필하시고 건강하세요.
차안수님의 댓글
내일다시 도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