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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봉지를 씌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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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봉지를 씌우며
몇 주 전부터 처제는 언니를 통하여 우리 부부에게 포도봉지를 씌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일손이 딸리니 우리 부부에게도 봉투 씌우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보다.
매년 上品은 아니지만 달콤한 포도를 얻어먹으니 포도농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껴서 흔쾌히 동의는 하였지만 그날이 당도하니 솔직한 마음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침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독촉했다. 비가 오니 봉지 씌우는 일을 어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물어 보라는 뜻이다. 대답은 비가와도 한단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포도 알이 부쩍 커져서 봉지 씌우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고 부리나케 대부도로 향했다. 흐린 날씨에도 비는 오지 않아 일하기에는 적당하리라.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포도밭에 들어서니 동서 친구 부부 두 쌍은 새벽부터 와서 일하고 있었다. 사촌 큰 처남 부부도 방금 도착하여 합세하니 포도밭은 일꾼으로 넘쳐나지만 너나없이 일에는 젬병이라 일의 진도는 순조롭게 나가지를 못한다.
품삯을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 농사꾼도 아니니 우리네 일 솜씨 능숙할 리 없고 책임감이라곤 전혀 없으니 담배 피우려 나오고 힘들다고 숨 돌리려니 들쑥날쑥한 우리들의 행동이 일의 진척을 제자리걸음으로 만든다.
옛날 우리 마을의 포도밭에서 포도봉지 씌운 것을 보지 못한 것을 떠올리고 ‘봉지는 왜 씌우는가?’ 처제에게 물었더니 봉지를 씌우지 않으면 신맛이 강해진다고 한다. 햇볕이 모든 작물에게 두루 다 좋은 줄 알았더니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과유불급이라 하신 공자님 혜안이 포도밭으로 엄습하니 내 마음 갑자기 뜨끔해진다.
봉지 씌우는 일은 포도송이를 봉지에 넣어 그 봉지에 붙은 가느다란 철사로 꼭지를 둘러 접는 간단한 일이지만 포도나무를 낮게 길러서 포도가 낮게 맺히게 하였으니 포도를 씌우는 작업은 허리를 적당히 숙여야 할 수 있으므로 자연 허리가 아픈 것이다.
포도밭에 들어가기 전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양파 꾸러미를 미리보고 저것이 우리의 품삯인 것을 안 우리들의 행동이 잽쌀 수 있겠는가.
새벽에 온 일꾼이나 제육시에 온 사람이나 제십일시에 불려온 사람이나 모두 한 데나리온 받을 것을 알고 있으니 일은 딴전이요 이야기가 주류다.
손 위 처남은 무료하니 나를 불러 여러 가지 세상일을 이야기 한다. 그 이야기 중에 나를 빗댄 것인지 함께 근무했던 군 출신 상사(上司) 이야기를 하신다.
자기 밑에 있던 동료 교사가 승진한 것에 미련 없이 교단을 떠난 처남은 강직함에 있어서는 어느 군 출신보다 떨어지지 않는 성격이므로 이야기에 군인이 등장하게 되니 자연 조심스럽게 긴장을 하게 된다. 초등교사로 시작한 교직생활은 교장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다가 뺨 한 대 맞고 그 즉시로 그만두었다하니 내가 조심하려 하는 것은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다시 들어간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5년 전에 명퇴를 하고 오늘을 살려면 이것저것이 모두가 눈에 거슬릴 것이다.
정월이나 추석날에 처갓집에 모이면 처남도 작은집이라 종종 마주할 때가 있어 고스톱이라도 칠 때면 나는 긴장하게 된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한 사람이 화투장을 몽땅 가지고 가서 나와 함께한 또 다른 사람은 어찌 할 수 없이 들고 있는 화투장과 바닥 패를 보고 상대방이 먹은 패를 둘러보며 상황을 짐작하여 가장 유리한 쪽으로 갈 수 있도록 들고 있는 화투짝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 순간 광박 피박 쓰리고다. 그때에 자신의 화투 패를 보이면서 이걸 왜 내지 않았는가 호통이다. 그러면 쓰리고는 면하였을 것을 함께 당했다는 원망의 소리인 것이다.
막내 동서는 할 말이 있어도 말 못 하고 얼굴을 붉혔으나 내가 그런 처지라면 이걸 내어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조금은 목소리를 올렸을 것이다.
상사는 중령 출신이라는데 군인의 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상사라 하지만 연륜도 비슷하고 마음도 통하여 어떤 때는 물중령이라 놀리는 때가 있는데 그래도 빙그레 웃고는 “그래 나는 물중령이지” 젊잖게 수긍하더라 하여 나도 그런 소리 가끔 들어요 하였더니 반가운 듯 누가 그러냐고 묻는다. 나는 친구라 하였더니 그게 좋은 거야 할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다.
말의 흐름에 따라 매끄럽게 흘러가기 위한 추임새인 것이 정말 본말이 되어 나의 귀를 울릴 줄 어찌 알았으랴. 일을 끝내고 다들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웃으며 처남은 다정히 물대위라 부른다. 자연 나는 그곳에서 물대위가 되었다.
물은 대단하다.
그 대단한 물이 사람의 자리에 앉으면 그 대단한 위력이 사라진다.
말랑말랑하게 되어 아무의 입에 들어가도 입은 다치지 않는다.
물병장으로 시작한 물은 물하사를 지나 물소위, 물중위, 물대위, 물중령, 마침내 대통령인 분도 물xx로 불리었으니 대단한 물의 역류로다.
역류하던 물이 다시 정상으로 흘러내리면 물은 급박해진다.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물은 폭포가 되어 순식간에 자기의 자리로 이동하려한다
위치는 힘,
힘은 에너지, 그리고 능력.
떨어진 거리만큼 축적된 힘으로 낙하하는 폭포는 대단하다.
친구들이여!
추락하는 것도 낙하라 하니 함께 추락하는 인생, 마지막 힘을 발산해 보세.
이윽고 오늘도 어김없이 내리는 어둠이 온다. 어둠 속으로 밤은 깊을 것이고 그 밤의 꿈을 얻기 위하여 나는 한 꾸러미의 양파를 품삯으로 받고 어두운 대부도를 쏜살 같이 빠져나왔다.
댓글목록 0
李聖鉉님의 댓글
양파가 혈압에 좋다는데요...
윤인문(74회)님의 댓글
포도..물..폭포..위치에너지..자연과 공학이 어우러진 것 같습니다..ㅎㅎ..요즘 양파값이 비싸다 하던데요..
오윤제님의 댓글
그럼 한나절 품삯으로 양파 한구러미가 충분한 것 같나요?
윤인문님의 댓글
충분할 겁니다. 혹시 다 못드실것 같으면 저에게도..ㅎㅎㅎ
李聖鉉님의 댓글
오선배님! 말 못해요
윤용혁님의 댓글
포도봉지를 씌우시며 인생철학과 처세술을 강론하신 윤제형님, 소탈한 형님의 잔잔한
모습에 양파삯은 정감을 더해줍니다.
따끈따근한 고운글 감사드립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담에는 포도나무 사람키 만큼 안되면 안 간다하세요..대부도포도밭...친근감니다..올추석도 대부도포도 맛보겠네..호주막내동생덕에..
오윤제(69회)님의 댓글
포도가 익을 무렵 한번 갑시다. 작은 집 지어 음식도 팔려하는데 내 품삯 제값 받아야지요. 넘치면 내년 또 일해주면 되고......
안남헌님의 댓글
대부도 포도밭가는분들이 많네요... 80회 이영우, 임승호 선배님, 울동기 홍진의....
이상동님의 댓글
포도밭 사역 함 가야는데...
이진호님의 댓글
몇해전 대부도로 부페행사를 갔습니다 행사는 돌잔치였는데..행사를 끝내고 정리하는데 수고했다며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께서 포도1box를 주셨습니다..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포도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납니다..정이 많으셨던 할머니는 잘 계시는지???...
박남호(87)님의 댓글
포도밭의 향이 여기에까지 묻어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