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비겁하게 살기
본문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번득이는 칼날 아래 현대인의 목숨은 그야말로 하루살이나 파리목숨보다도 못하다. 공공연하게 비겁하게 살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마치 비수를 감춘 채 등 뒤에서 음험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아니, 발톱을 감춘 매처럼 말이다.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진지함을 맛볼 수가 없다.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하여 제 욕심을 채우려 들지 않을까 하고 의심부터 앞서기 때문이다. 이 무슨 구역질 나는 세상이냐....... 가슴만 답답하여라.
비겁하게 살기
진 우 곤
아침 출근길에서였다. 전철에서 내려 근무처로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기에 대체 누구일까 하고 뒤돌아보았다. 상대방은 손을 번쩍 들며, 오랜만이군 하고 내게 다가와 선뜻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딱 바라진 체격의 그는 오래 전에 나와 함께 같은 부서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직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수년 전에 소속기관을 달리하면서 그의 근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터라 매우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보다 연배가 약간 높은 그의 손엔 자그마한 서류가방이 들려 있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그는 3년 전에 명예 퇴직하였다는 의외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3년치의 특별 명예 퇴직금을 준다기에 언제 이런 거금을 만져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선뜻 사표를 내던지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즉, 많다고 생각했던 퇴직금이 막상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빚의 청산과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자식들의 교육비를 대느라 거의 다 까먹고 지금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어딘가에 다닌다며 자신의 서류 가방을 들어올리더니 사는 게 말이 아니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게 아닌가.
그는 시간만 허락한다면 나를 붙들고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말을 다 들어줄 입장이 되지 못했다. 사무실에 도착할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하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다음을 기약하자고 말하려는데 그는 대뜸, 비겁하고 치사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모르는 척 버틸 때까지 버텨라, 경기가 안 좋은 요즈음에 섣불리 나왔다가는 자신의 경우처럼 돈이 곶감 빼먹듯이 금방 새나간다고 덧붙였다. 그의 언성은 사뭇 크고 걸걸하여 행인들은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출근길 노상에서 그와의 우연한 만남. 아쉬운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직장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발걸음은 여간 무겁지 않았다. 속으로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눌 때 사뭇 어둡던 그의 표정과 돌아서서 가는, 어깨가 축 처진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눈알을 아프게 찔러왔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하루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직장에 오래도록 다니는 내가 부럽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약방의 감초처럼 내게 하는 말이 있다,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버틸 때까지 버텨라, 수틀린다고 제 분에 못 이겨 불쑥 대들지 말고 굽힐 땐 굽혀라. 그래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저 혼자 정도를 지키겠다고 고지식하게 굴다가는 요주의 인물내지 해고당하기 십상이라며 때로는 체면이나 자존심도 꺾을 줄 알아야 하고, 아첨과 아부도 때에 따라서는 양념처럼 간간이 섞으며 처신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흐르는 물처럼 대세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불가피 적당히 타협하는 지혜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뭔가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듯 세상은 ‘비겁하게 살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아니, 그것이 처세의 정상적인 방편인 양 둔갑하고 있으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내면적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보다 명예, 사회적 지위, 권력 따위의 한낱 외형적인 삶의 모습만 가지고 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잣대로 삼으려 대든다. 이는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처럼 가히 ‘영웅 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영웅으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자격 요건인 진실과 성실은 흡사 먼지를 덮어쓰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쓸모 없는 가치관인 양 냉대하고 있으니 흡사 남이 씹다 버린 껌을 도로 주워서 씹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문득 근래의 한 술좌석에서 인생을 논하던 중 방송국에 다니는 고교 동창생인 J가 '비겁하게 살기'라고 태연스럽게 말한 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고 토를 달았던 일이 떠오른다. 엉뚱한 그의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의 진심에서 우러난 말인지 아니면 술을 마신 기분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실언인지 여부를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집에서 나와 헤어지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어쩌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방송국에 다니니 어련할라고. 결코 빈말은 아닐 게다. 즉, 요즈음 세태의 키워드를 잡아챈 게 아닐까. 다만 그가 토를 달은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은 자신의 심경을 넌지시 표현한 것이라 헤아려졌다.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동창 J의 지적대로 ‘비겁하게 살기’가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무수히 쏟아지는 실언, 이리저리 둘러대는 극에 달한 거짓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해 되는 막말 잔치의 인신 공격. 그것에 진정으로 책임지려는 이가 없다. 마땅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함에도 자리 보전에 연연해 하는 모습. 고위 공직자도 그렇고, 국민의 대표기관에 몸담고 있는 국회의원의 작태도 그렇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꼴사나운 광경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끗을 위해 지조도 팔고 교언영색으로 처신하는 이들. 아니, 그것이 정상적인 처세술로 둔갑하고 있으니 언제 이 음산한 바람과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끼어 있는 안개가 걷힐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가. 단 하루를 살아도 진정 내가 나답게 사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고 싶은데 말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 쾌락과 사치, 허영이라는 것. 어찌 보면 햇살이 퍼질 때 쉽게 말라버리는 이슬과 진배없다. 단순 명쾌한 것이 진리라고 한다. 복잡한 변화는 딱 질색인 나 또한 세상을 호연지기로서 담대하게 바라보고 싶건만 그게 쉽지 않다. 어째 세상은 비겁하고 간교한 수법으로 무기를 삼고 광분하는지 모르겠다. 지혜롭고 슬기롭게 사는 비결은 비겁한 자가 되지 않음에 있다는데 이젠 그 말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곧은 나무는 쉬 꺾이고 용감한 자는 공공연히 끌어내려지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공허한 과시, 무대 위의 연극, 양떼, 소떼, 투창, 들개의 무리에게 던져 준 뼈다귀, 연못의 물고기에게 던져 준 음식 부스러기, 바쁘게 땀 흘려 일하는 개미, 겁먹은 생쥐가 우왕좌왕하는 모습, 끈으로 조종되는 인형,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러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되, 도량 있는 자세로 몇 시간을 버텨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이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
이것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이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는 말처럼 살려고 나 역시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참되고 올바른 길이 있음에도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우주적 질서를 위배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명성을 떨쳤으나 결국 망각 속에 묻혀 버렸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명성을 찬양하거나 부러워하다가 우리들 앞에서 사라졌는가?’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오늘도 파김치 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오르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가슴을 울려댄다. 울적할 때마다 읊조려보는 나의 애송시 중에 하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의 양심과 지조, 혹은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명시로서 아직 제대로 된 터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에게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나 역시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게 갈수록 어렵고 버겁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켠에서는 시시때때로 아무리 비겁하게 살기가 각광을 받는 세상일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동안 머물렀다 저 세상으로 가는 인생. 육체는 늙고 병들어 죽으면 썩어지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법이다.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다음 세상에 가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즉,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른다면 말이다. 사후의 세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는 동안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리와 양심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나 자신을 키우는 디딤돌로 삼고 싶다. 결코 ‘비겁하게 살기’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나의 안간힘이 한낱 남의 비웃음거리가 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숨막힐 정도로 복잡한 전철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을 때 ‘비겁하고 치사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모르는 척 버틸 때까지 버텨라.’라는 말이 귓밥을 울리자 더더욱 피곤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랫입술을 꽉 눌렀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늘 마음은 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드넓은 벌판을 힘차게 달리고 싶건만…….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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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님의 댓글
선배님께서 던져주는 매세지 "비겁하게 살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처세술과 소신대로 살기가 양립하는 가운데 고민이 생기지요.
그러나 비겁하게 살기보다는 양심껏 순리대로 살고 싶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데 사고케하는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우리 모두 살기위해 살벌해지고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내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살기가 어려워 졌다는 얘기겠지..바쁜데도 불구하고 이런 좋은 글을 올려주어 고맙네..항상 건필하길 바라네.. 남들이 글보기가 안좋은 것같아 보기좋게 수정했네
오윤제님의 댓글
비겁한 것도 커다란 용기라 생각합니다. 한신이 시정배들의 다리를 헤치는 굴욕이 있었기에 한나라의 건국이 있었겠지요. 참을 수 있는 용기 알면서도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울 때 도 있습니다.
장재학님의 댓글
고민하며 내렸던 결정에 본인이 후회를 할때 가장 마음이 아플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