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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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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초리
나의 초등학교 일학년 시절 아버지는 교무주임으로 근무하고
계셨고 나랑 1,2등을 다투는 친구의 아버지는 교장이신데
아버지랑 갑자생 동갑이셨다.
아버지가 중간에 잠시 휴직을 하시는 바람에 그분보다 승진이
늦으셔서 그리된 것 같았다.
일제고사시험이 있었는데 국어 시험문항에 네모 네 칸을
채우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나는 ‘토끼가 “깡충깡충” 뜁니다.’라고 답을 채웠고 교장선생님
아들인 친구는 “껑충껑충”으로 적어 선생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히 갈려 고민들을 하셨다 한다.
내 것을 정답처리하면 내가 일등이 되고 그 친구를 맞다하면
그 애가 일등이 되는 박빙의 순간, 교과서에는 “깡충깡충”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하나로 정답을 처리하려다 교장선생님의
외아들이기에 둘 다 맞은 것으로 하였다한다.
좀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난들 어쩔 수가 없었다.
삼학년까지 아버지는 우리학교에 계셨는데 매번 시험이 끝나면
아버지는 시험지를 들고 오셔서 틀린 문제의 정답풀이를 해 주셨고
시험을 잘 보았을 때는 어머니의 칭찬과 함께 쑥 개떡이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효모를 넣고 따스한 아랫목에 광목이불을 덮어 부풀려 팥을 넣고
찐빵을 맛있게 쪄 주셨으나 전보다 시험을 못 봤을 경우에는 여지없이
아버지의 정신봉인 옷장 위 가느다란 회초리가 날 빠끔히 내려다보며
“너 오늘 이제 죽었다.” 라고 외쳐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동네 다른 아이들은 그 집 부모님들이 시험을 보거나 말거나 빵점을
맞든 말든 산과 들로 나가 배불리 소에 풀을 먹이면 만사 그만이었고
노을이 붉게 지는 저녁 해질 무렵 소등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개선장군처럼
들어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산수에 도형과 분수를 잘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틀린 문제를 너무 매섭게 몰아치시는 바람에 주눅이 들어 자꾸 틀렸다.
애가 아둔하다며 어머니께 화살을 돌리면 어머니는 참 어이없어 하셨다.
책상머리에 꿇어앉아 이미 아버지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터에
알밤까지 맞은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서워 크게는 울지 못했다.
“야! 나가 코 풀고 와.” 답답하다며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그런데 코를 푸는 순간 코피가 주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 코피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내리니 아버지는 약간 당황해 하시는 것
같았다.
저녁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안아 목을 뒤로 제친
후 찬 수건을 이마에 대 주시고 콧등을 가볍게 눌러 주셨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어머니의 품이 그렇게
포근할 수 가 없었다.
나는 많이 아픈 척 신음소리와 함께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아버지가
더욱 놀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제로 코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어머니는 아버지께 핀잔을
주시며 한마디 툭 던지셨다.
“당신은 정말, 어린애를 죄인 다루듯 하시면 그 애가 알던 것도 다 까먹겠어요.”
어머니가 완전히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순간 이었고 뺨을 어루만지시는 평소
논밭일로 그렇게 두텁던 어머니의 손길이 오늘따라 너무나 부드럽고 따스해
마냥 좋았다.
철없는 동네친구들은 사태파악을 못한 채 “친구야 놀자!”를 대문 앞에서
외치다 삐꺼덕 소리가 크게 나는 대문을 와락 열며 야단치는 아버지께 화들짝
놀라 쫓겨 가며 검정 고무신짝이 벗겨져 나뒹구는 것을 허겁지겁 손에
주워들고 줄행랑을 쳤다.
누나는 일러바치기를 참 잘했다.
내가 아침에 뜰 안에서 세수를 하는데 돌담 너머에서 별명이 “꾀꼬리 새”인
사촌형이 “꾀꼴”하며 꾀꼬리소리를 내기에 세숫대야 물을 담장너머로
들이부었는데 사촌형은 흠뻑 적은 생쥐가 되었고 때마침 지나가던 옆집
아주머니 옷에 그 물이 튀었다고 아버지께 고자질을 하였다.
그 바람에 나는 아버지께 불려가 회초리로 종아리 다섯 대를 맞았다.
이에 중학교를 다니다 겨울방학 중 인천에서 내려온 형은 사사로운 일에
아버지께서 아침부터 너무하셨다고 “아버지, 꼭 이래야만 됩니까?”
하더니 “다 나와라!” 하며 절굿공이를 들고 시위를 하다 “이놈의 자식!” 하는
아버지의 호통 한마디에 담장을 뛰어 넘어 성당입구에 숨어 아버지가 노기를
푸실 때까지 오들오들 추워 떨며 집에 들어가질 못했다.
형이 너무 불쌍해 주먹밥을 몰래 가져다주니 배가 고팠는지 그걸 단숨에
먹어 치웠다.
동생을 위해 형은 객기를 부리다 추운 겨울날 혼쭐이 나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가 그날 일직이라 학교에 가시는 바람에 형은 집에 다시
들어 올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 방문 고리를 잠그고 단체로 벌을 주셨다.
아버지와 달리 회초리가 아닌 부지깽이나 급조된 마른 솔가지로 누나로부터
시작하여 그간 지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듯이 일곱까지 정도를 불도록 했다.
형은 인천으로 유학을 갔으니 없었고 누나는 잘못을 꾸며서도 잘 불어
거의 매를 맞지 않는 순발력과 기발함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못한 것이 별로 없고 거짓말로 꾸며대는
것은 추호도 싫었다.
“엄마 말 안 듣고요, 공부 안하고요, 동생이랑 싸우고요.” 그러면
어머니는 “또!” 하며 매를 드셨으나 더 이상 고백할 것이 정말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네 대 이상은 맞아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아주 약은 꾀돌이 동생은 나의 취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잽싸게 방문 고리를
열고 냅다 도망을 쳤으나 워낙 빨라 어머니는 도저히 쫓아가 잡을 수가 없었다.
서산해가 넘어가 산마루에 걸릴 쯤 동생은 갑자기 동네에서 큰일이 난 것처럼
뛰어 들어오며 “어머이! 어머이! 큰일 났어요. 저기요?” 하면 어머니는 부엌의
아궁이에 불을 때시다 “뭐라고?” 하며 큰 관심을 보이면 동생은 “아니에요.
어머이!”하고 시치미를 떼 아까 도망친 일을 모면하니 어머니는 어이없어 하며
웃어 넘기셨다.
나만 미련하게 어머니에게 매를 다 맞은 것 같아 무척이나 속상하였다.
그러나 약은 동생도 코 빨개 삼세할아버지네 설익은 복숭아 서리를 하다
들켜 그 집 할머니의 항의에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나셔서 동생을 불러 회초리가
아닌 무지막지하게 날이 선 장작개비로 때리셨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자식들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과 거짓말만큼은
절대 용서를 하지 않으셨으며 선생의 자식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 그런 짓을
하였다는 사실에 상당히 격해지셨던 것 같았다.
그날 밤 소쩍새도 놀라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사랑의 매 회초리,
요즘 학교에 뜻있는 학부모들이 교사에게 제발 우리 애들을 사랑의 매로
이끌어 달라는 뜻으로 회초리를 기증하였다는 소식에 참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랑의 매는 얼마든지 맞아 우리애가 바른길로 나아간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못된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많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의 목을 조르고 여선생님에게 발길질을 하는
한심스런 세상과 스승을 고발하니 경찰이 나서 교권을 위협하는 세태에 오늘날
아버지의 회초리가 더없이 고맙고 그리워지며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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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수님의 댓글
시골 잡안 대들보엔 메주가 주렁주렁, 그사이엔 "회초리"가 항상 걸려있었지요. 할아버지의 회초리 그시절로 돌아갔으면 좋으련.. 회초리하면 할아버지가 보고싶어라.
윤용혁님의 댓글
전재수 선배님, 할아버지를 그리고 계시는군요. 집안에 어른이 계셨기에 오늘날 저희가
바르게 컸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인문형님에 글에 저 또한 동감하며 이나라의 교육과 오늘도 박봉에 수고하시는 교사들의 권위가 바로서기를
기원합니다.
지민구님의 댓글
예전엔 맴매에서 회초리로..그렇게 자연스레 아이들이 커갔는 데..
윤용혁님의 댓글
민구,남호 후배님이 오셨군요. 사랑의 회초리가 많이 변질되어 갔어요. 버릇없는 아이들도 많이 양산되었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한상철 후배님 오셨군요. 한국정서의 독특한 교육방식으로 세계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백년대계의 교육적 목표가 뚜렸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