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오해((김태희(101)님께 드립니다))
본문
굳이 작품을 올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올린 작품 '나부상의 전설'로 인하여 자상하신 김태희(101)님께 결례를 범한 것에 대한 벌로 이것으로나마 위안이 되실지....... 저는 솔직히
'김태희(101)'라는 리플을 보고 인고 출신 후배의 한 분으로 알았었지요.
하, 그런데 인고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누군가의 귀띔에도 긴가민가하였더니 손수 저에게 해명을 해주셔서 그제서야 의문이 풀리고 말았는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문득 예전에(2002년도) 쓴 '오해'라는 작품이 떠올라 '김태희(101)'님께 드립니다. 마음이 풀어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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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인 딸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는데 딸이 다짜고짜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게 아닌가. 서두르는 품으로 보건대 나를 학수고대한 눈치다.
영문도 모른 채 앉자, 딸은 며칠 전에 치른 것이라며 내밀기에 보니 수학 시험지였다. 선생이 틀린 문제를 내일까지 풀어 오라고 숙제를 냈단다. 훑어 보니 20개 문항 중 3개가 빨간 색연필로 가위표가 되어 있었다. 딸은 그 중 두 문제는 자신이 덤벙거리는 바람에 틀렸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문제만은 왜 틀렸다고 했는지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풀어도 자신이 쓴 답이 맞단다.
그랬다. 내가 풀어도 ‘72’라고 쓴 딸의 답이 나왔다. 혹시나 하고 두세 번 풀어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내 입에서 ‘72’가 답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정말 그게 맞지요 하고 낯빛이 금새 밝아지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면서 내일 선생님한테 따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은 그것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던 모양 같았다.
왜 채점이 잘못되었을까. 선생의 실수였나, 아니라면 뭔가 이유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이 궁리 저 궁리해 보아도 나는 미궁에 빠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좀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딸이 쓴 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72’라는 숫자 중 ‘7’이 아주 묘하기 짝없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누군가 그것을 두고 언뜻 보기에 ‘5’자 비슷하다고 우긴대도 할 말이 없을 듯했다. 이러고 보면 선생이 ‘72’라는 숫자를 ‘52’로 본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갔다. 설마 선생이 맞는 답을 틀렸다고 했을까.
나는 제 방으로 들어간 딸을 불러내었다. 우선 ‘72’가 답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썼는지를 묻자, 딸은 그랬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내가, 그렇다면 너는 그 문제를 옳게 풀은 것이다, 혹시 네가 ‘7’자를 ‘5’자로 오인하도록 쓴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틀렸다고 했겠느냐, 아무래도 선생이 ‘7’이라고 쓴 네 글씨를 ‘5’자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니, 딸은 얼굴을 붉히며 시간에 쫓긴 나머지 그렇게 흘려 써졌노라고 실토하는 게 아닌가. 이에 나는 글씨란 모름지기 제삼자가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종종 본의 아닌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기지, 이번 경우는 네 책임도 면할 수 없다, 아무튼 이번 일을 거울삼아 지금부터라도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7’자에 대해 열 번 정도 쓰는 연습을 시켰다. 차후에라도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을 주고자 함이었다.
이와 같이 오해로 인하여 불이익을 당하는 게 비단 글씨에서뿐이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오해는 종종 약방의 감초처럼 뛰어들어 서로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곤 한다. 부모와 자식, 노인과 손자,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등 그 어떤 관계라도 오해는 가리는 법이 없다. 심지어 피를 함께 나눈 형제간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 결과 단란한 가정의 화목이 일거에 와르르 깨지거나 의가 상해 한동안 남남처럼 지내기도 한다.
오해는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간에도 싸움의 불씨가 되어 서먹서먹하게 지내도록 만들고, 친구간에도 오래도록 다져온 돈독한 우정에 금이 가서 원수 관계로 돌변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이 오해란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이어서 뼈를 녹이는 근심에 버금갈 만한 독버섯과 같다고 아니할 수 없다.
언젠가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우리와 왕래가 잦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의 한 아주머니의 경험담인데 내용인즉 오해로 빚어진 괴로움을 아내에게 토로한 것이었다.
어느 날, 그 분은 아내도 잘 아는 같은 교회 식구와 별거 아닌 일로 언쟁이 일어났다. 나중에 판명되었지만 그것은 서로가 남의 입장을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렸더라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을 정도로 사소하기 짝없는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서로 자신만이 옳다며 감정을 앞세운 나머지 그 길로 의가 상해 버리고 말았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고 보니 그 후에도 누가 먼저 선뜻 화해하자고 말을 꺼내기는커녕 사이가 뜬 채로 지낸 지가 수 개월이나 되었다는 게 아닌가. 어쩌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지나쳐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화해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여간 쑥스럽지 않아 이냥저냥 지내오는 터인데 어찌해야 좋은지 무척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 인들이 아닌가. 누가 옳고 그른지 나로선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깟 일로 수 개월째나 등을 돌리다니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면서 오해가 무섭긴 무섭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아내도 그들이 바늘과 실처럼 어울려 다니던 사이임을 잘 아는 터라 사뭇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듣고 얼마 안 있어 다행스럽게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 해 연말이었다. 말기 간암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한 여성 집사를 병문안간 게 그 계기가 되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 여성 집사는 장로인 남편과 함께 성가대 봉사까지 하며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던 이였다.
하루는 몸이 찌뿌드드하기에 별 생각 없이 병원에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이미 늦어 손을 쓸 수 없다고 의사가 남편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 주었다. 혹시나 하고 다른 병원에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교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 여성 집사에게 문병을 갔다. 짬을 내어 아내도 동행하던 날, 공교롭게도 오해로 등을 돌리고 지내는 장본인들과 같이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으며,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딴전을 피우는 게 아닌가. 그것을 바라보자니 아내의 마음도 답답하고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문병은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낳았다. 다름 아닌 죽음의 문턱에 선 그 여성 집사의 진솔한 다음과 같은 고백 때문이었다. 자신은 성격이 워낙 모나서 소경이 개천 나무라듯 제 잘못은 제쳐두고 남의 탓만 하거나, 시기심도 강해 비꼬기를 밥 먹듯이 했다. 따라서 걸핏하면 남과 시비가 붙거나 오해를 사서 사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수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에 남편이 기회 있을 때마다 그래선 안 된다며 성도답게 품위를 갖추라고 충고해 줘도 좀처럼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벌컥 화를 내며 일축해 버리기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남편이 혹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에게 오해로 마음에 상처를 안긴 일은 없는가, 만일 그것이 남아 있다면 말끔히 풀고 주님에 품 안에 안긴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에 그녀는 처음엔 의아할 정도로 남편의 말을 고깝게 여겼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미구에 자신이 죽으리라는 건 기정 사실이 아닌가. 남편도 그 말을 꺼내기가 무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고심 끝에 그런 용단을 내렸으리라 짐작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온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언제 죽더라도 정결한 마음으로 천국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불끈 치솟는 게 아닌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듯이 그녀는 즉시 실천에 옮겼다.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거나 문병 온 이들에게 서슴없이 말했다. 함께 지내오는 동안에 자신의 옳지 못한 처사로 오해나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하노라니 마치 무거운 짐을 하나하나 벗는 듯 나날이 즐겁다며 밝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비록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지만 하나도 두렵지 않다. 까닭인즉 이렇게 하는 자신을 주님께서도 반가이 받아 주시리라는 믿음이 샘솟듯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모두들 눈시울을 적셨다. 장로인 남편의 지혜로운 용단과 죽음 앞에서도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인 여성 집사의 용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병원에서 돌아올 때 느닷없이 오해로 원수처럼 지내는 두 여성 집사들의 소매를 잡으며 화해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치 그들은 서로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마주보며 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아내도 설마 그렇게 되리라 예상치 못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선으로 잘 해결되자 마치 앓던 이가 빠진 듯 홀가분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와 같이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오해의 해결은 결자해지(結者解之)밖에 달리 없다. 당사자간에 조금씩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면 그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 행동거지만 옳다고 버티다 보면 어찌 되겠는가.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짐은 물론 불순한 감정이 개입하여 미덥지 못한 결과를 낳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같은 현상은 대체로 고집이 세거나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마음이 넓고 지혜로운 사람은 오해로 인한 미움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며 물러설 줄 안다. 까닭인즉 오해에 붙들리면 붙들릴수록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능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떠올리며 남에게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애쓴다. 당장이야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나중엔 오히려 득이 되는 경우를 왕왕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내 주장이나 생각이 옳더라도 한 발짝 물러서서 재고하면 거기엔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오류가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오해는 될 수 있으면 속히 푸는 게 좋다. 아니, 그보다 먼저 언행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야말로 오해가 싹트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특히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은 오해가 틈입할 여지가 많으니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4복음서의 하나인 마태복음 7장 3절엔 이런 말이 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이는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을 살피기에 앞서 남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종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를 낳고 증오심을 부채질하는 근인(根因)이 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금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이 ‘역지사지’와 함께 두고두고 새겨보아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로 환영 받을 수 있을까. 더불어 사는 삶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이 때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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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님의 댓글
101회라는 단어가 우선 반갑지요. 이름 그대로 크게 맑을 것도 같고, 못 알아 본건 잘 못이겠지만 잘 못 볼수 밖에 없는 숫자가 문제일 겝니다. 오늘 웃으며 이 글 보며 태희님은 호호 하시지나 않을지
이환성(70회)님의 댓글
형님도 4/28이후 글이 안보이네요..남들 오해(?)할 수 있으니..신형섭님도 건강하시죠?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오해는 또 오해를 낳을 수 있다하니 속히 푸는게 좋겠지요..成님도 쓸 양식이 떨어져 꼬리글에만 전념하신다 하는 것도 오해가 될 수 있사오니 속히 글을 올리셔야 하실 듯..ㅋㅋ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나...영주권 나왔다네...
김태희(101)님의 댓글
오해 받고 잠시 젊어졌다고 즐거워했더니 이것도 일장춘몽인가??..ㅎㅎ<br>
제 이름과 아들아이 이름을 같이 붙여야 오해가 없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음을 용서 바랍니다.<br> 아들애가 알면 자기 망신시킨다고 길길이 뛰거든요.ㅎㅎ
김태희(101)님의 댓글
<embed src="http://jk133.X-Y.net/link/Jason Donovan-Rhythm 0of the rain[1].wmv" loop=-1 width=450 height=380 enablecontextmenu="0"><br>♪ Jason Donovan / Rhythm of the rain<br> 아이고~~이게 웬일...(위에)줄 바꾸기에서 소스가 에러나네요. 누구시든 지워주심 감사.
진우곤님의 댓글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제 오해가 봄눈 녹듯이 풀렸으니........
윤용혁님의 댓글
태희님의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선배님의 오해의 글을 읽고 항시 역지사지에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렵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박남호(87)님의 댓글
마지막 키스장면......, 남녀간의 오해는 키스가 한몫 한다지요. 오해살수 있게 애인이 있었으면 하는 남호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