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도시락
본문
누구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선뜻 얘기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노릇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자존심 상하게 굳이 까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다음의 작품은 10년 전에 발표했던 것이다. 작품 활동 초창기라 대부분 부끄러움을 내팽개치고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얘기들을 풀어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유인즉 가난했던 시절의 뼈아픈 추억들을 작품으로 걸러내야만 보다 넓고 깊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그 단계를 넘어서자 나만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사회 전체로 시야를 넓혀 작품을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니 자못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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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올해부터 초등학교 3학년짜리인 딸애가 일주일에 네 번씩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그런 알에는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도시락 이야기를 하니, 문득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졸업할 때까지 소풍 갈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 못했다. 추억에 남을 수학여행은 고사하고 졸업앨범조차 사지 못했으니…….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가난밖에 달리 생각나는 게 없다. 그저 가슴이 서늘할 뿐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할 4학년 때부터 나는 생활 극빈자로 분류되어 학교에서 주는 손바닥만한 옥수수 빵을 점심으로 받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애들도 한 반에 서너 명씩 있었다. 교탁 앞으로 나가 선생님으로부터 그 빵을 받을 때마다 내게 집중되는 급우들의 이목에 낯이 뜨거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옥수수 빵을 점심으로 때우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가방에 집어넣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우는 것으로 배고픔을 달랬다. 왜냐하면 혼자서 집을 보고 있을 내 바로 밑의 아우가 마음에 걸려 내 욕심만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 난 아우가 누구에게 얻어맞고 울지나 않는지, 혹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무엇을 어찌하다 연탄불에 데이지나 않았는지 별의별 생각으로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선생님한테 자주 꾸지람을 듣곤 하였다. 고대하던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이 내 팔을 붙들며 함께 놀고 가자 해도 냉정하게 뿌리치고 집으로 내처 줄달음쳤다.
집에 닿으면 쌍수를 들어 반기는 아우와 함께 옥수수 빵을 나눠먹을 때의 맛이란 꿀맛, 바로 그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도 뇌리에 생생하다.
‘황승록’이라는 친구가 내 짝이었는데 집안이 부유해서 그랬는지 그가 매일 싸오는 도시락은 군침이 돌 만큼 반찬이 다양했다. 특히 하얀 밥 위에 얹은 계란 후라이가 볼수록 탐이 났다. 그는 내가 옥수수 빵을 타가지고 자리에 앉으면 자신의 도시락을 내게 슬그머니 건네주거나 하다못해 계란 후라이를 집어주며 바꿔먹자고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수저를 두 벌이나 챙겨가지고 와서 밥을 같이 먹자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우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며 야박하게 자리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나가기가 일쑤였다. 뿐더러 5학년을 마칠 때까지 그의 도시락을 한 번도 같이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에게 동정 받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차라리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울지언정…….
어느 때던가. 나를 끔찍이 생각해주는 그의 호의에 못 이겨 내가 받은 옥수수 빵의 반쪽을 그에게 떼어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 빵을 맛있게 먹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그랬던 그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였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어머니께서 억척스럽게 행상을 하신 덕분에 집안 형편이 다소 나아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도시락을 맛있는 반찬으로 잘 꾸려줬다. 그래서 빨리 점심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나로 하여금 학교생활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했다.
중학교 2학년 초였다.
국어선생님이 자유로운 제목을 가지고 작문을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신 적이 있었다. 나는 무엇을 쓸까 한참 망설이던 끝에 “도시락”이라는 제목을 달고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써냈다.
며칠이 지난 후에 국어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며 대뜸 나를 부르시더니 교탁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나는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교탁 앞으로 나가자 국어선생님께서는 반 전체 학생들을 향하여 내가 쓴 “도시락”이라는 제목의 글이 썩 잘되었다고 칭찬하시더니 나더러 낭독해 보라고 원고를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원고를 읽어나갔다. 처음엔 술술 읽혀졌으나 아우와 내 짝 ‘황승록’에 관한 대목에 이르러선 갑자기 목이 메이고 눈물마저 왈칵 쏟아졌다.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삼키느라 더 이상 원고를 끝까지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가난이란 냄새가 원고 위에서 춤을 추었고, 그러한 것을 밝힌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복받치는 내 감정을 아무리 애를 써도 고삐 풀린 말처럼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묵연히 밖을 내다보시던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시며 자리에 가 앉으라고 한 뒤, 내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원고를 마저 읽으셨다.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오라고 하셨다. 글이 좋아 어디엔가 낼 것이니 내용을 좀더 가다듬어서 제출해 달라고 이르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작문 실력이 워낙 짧아 며칠을 끙끙대기만 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나도 이젠 아들딸을 가진 어엿한 부모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다니는 직장이 있고, 조그마한 내 집도 한 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어렸을 때처럼 먹을 걱정 따위는 전혀 없다.
자식들이 가끔 밥상머리에서 입에 맞는 반찬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곤 한다. 억지로 먹게 하려는 아내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아내가 바쁜 나머지 미처 시장을 봐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참다못해 벼락 같이 호통을 쳐댔다. 내 어렸을 적의 우울하고 아픈 기억들이 더욱 나의 분노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기아에 허덕여 매일매일 죽어가는 소말리아의 불쌍한 어린애들의 경우를 들어가며 너희들은 복에 겨워서 그렇다고 꾸짖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더구나 길 위에 기어 다니는 벌레까지 집어먹는 그들의 사진을 익히 보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끝내 나는 아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하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씩씩거리고 있자, 아내는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요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다고 하며 너무 야단치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자식들을 감싸고도는 아내의 역성이 심히 못마땅하여 애들을 그런 식으로 오냐, 오냐 하면서 키워가지고 뭣에 쓰겠느냐고 더욱 언성을 높이고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꽉 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배고픈 심정을 겪어보지 못한 그들이 어찌 내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알겠는가.
어쨌든 그런 일이 발생한 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애들은 밥투정하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 제 몫의 밥을 싹싹 비우는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이것도 사는 재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아내는 딸애의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 후라이를 만들고 멸치를 볶고 있다. 곁에서 거들어주는 딸애의 눈가엔 기쁨의 빛이 가득 넘친다.
하지만 2학기 때부터 학교에서 부모들의 동의를 얻어 급식을 실시키로 했단다. 도시락 반찬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아내의 수고가 한결 가벼워지겠지만, 내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도시락 반찬을 함께 준비하는 모녀간의 정겨운 모습을 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앞섰다.
(1997년)
댓글목록 0
오윤제님의 댓글
우리 시대에 경험한 이야기를 다시 볼 때 마음이 아련합니다. 할아버지의 밥상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알고 천천히 밥을 먹던 것은 그래도 할아버지는 흰 부분이 더 있었으니 그걸 먹으려 그러했는데 몽땅 먹어 버릴 때는 못내 서운했지요.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이제는 학교마다 도시락문화가 없어진 듯 합니다. 점심시간만 되면 친한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의 반찬을 나눠먹으며 정을 나누었던 우리의 학창시절..이제는 영양 칼로리가 고려되고 모두가 똑같이 규격화된 급식을 먹고 있는 지금의 학생들..좋은세상이 되긴했지만 배고팠던 어려운 우리의 시절을 기억할런지..
윤인문님의 댓글
이런 도시락에 밥먹어 보셨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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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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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101)님의 댓글
황승록이라는 5학년짜리의 속 깊음이 기특합니다. 나이 성별,출생지등을 아니까 경찰청 통하면 찾을 수 있을텐데...<br>너무 기특한 아이라 제가 괜히 찾아보고 싶은...ㅎㅎㅎ<br> 이 노래 뚜아에모아가 불렀는데 지금 이 사람들은 누군지요?
윤용혁님의 댓글
진우곤 선배님의 눈물에 도시락에 가슴이 저려 옵니다.
추억의 양은 도시락에 마음을 두렵니다.
절절한 선배님의 글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추억속의 도시락이 아련히 떠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