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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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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모님을 강화에서 동생이 주섬주섬 짐을 싸 아주
누님 댁 곁으로 모시고 올라왔어요.
언제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신다고 대부분의 살림살이와 가재도구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아버지의 양손에는 냉장고에서 건져낸 다 썩은 조기 다섯마리와
쪼그라든
참외 두개 그리고 자식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 줄 부채 다섯개가 들려 있었어요.
동생의 손에는 나중에 영정사진으로 쓰라는 것인지
두 분이 그래도 젊은 날 찍어두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액자만 다른
짐 보따리 보다도 크게 눈에 들어오기에 한편으로 반가웠으나 그 사진의
용도를 알고는 상상도 하기 싫어 잘 안 보이는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라
일렀어요.
시골성당의 사제회장으로서 17년간 미사보혈조력을 주일날 마지막 봉사로 하시고
아버지께서 성도들에게 작별인사말씀을 하시다 도중에 울음을 터트리시는
바람에 성당 안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군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전들 여러분 곁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제 아내는...."
어머니도 덩달아 우시고 동생도 줄기차게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무척 고통스런
시간이었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성당에서 울던 것을 집에 와서도 목 놓아 우시더랍니다.
고향의 이별도 이러할진대 생의 작별은 얼마나 슬플까요?
아마 54년을 옆집에서 살며 쌓은 정과 이제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더욱 그러셨나봅니다.
수십 년간을 정붙여 사시던 고향집 대문에 자물쇠를 굳게 잠그고 두꺼비집을
내리실 때의 아버지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지난 일요일에는 자식들이 전원 대기상태로 기다려 부천에 올라오신 두 분을 영접하고
점심을 같이 하였는데 이번에는 식사도중에 형이 울먹여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졌답니다.
당신들이 살 집이 정갈하고 마음에 드시는지 오늘 아침에
전화를 드리니 아주 잘 주무셨다는군요.
정든 땅,
산이 둘러쳐진 물 맑고 공기 좋은 목가의 고향집을 버리고 구지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54년 전,
조그만 성당이 자리한 바로 옆에 당시 뽕나무가 무성했던 그곳을 집터로 삼고
부모님은 알뜰살뜰 신접살림을 차리셨답니다.
6.25 전쟁 통에 바닥 빨갱이들이 큰 아버지를 납치하러 왔을 때 아버지도 그곳
우거진 뽕밭을 지나 몸을 피하셨고 붙들려 놈들에게 끌려 나가는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셨죠.
그 후 수십 년간 새벽제단을 쌓은 어머니의 기도로 인천 석남동 개 넘어 살 때 연탄가스로
중독된 당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기적적으로 구해내셨죠.
일요일 오후, 안성으로 떠나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오보에 남편을 잃었다는
어머니의 절규는 안마당을 뒹굴며 “이제 당신 없이 어찌 산단 말입니까?” 하며
몸부림치시던 그 곳을 잊을 수가 없군요.
자식들은 제각기 짝을 이뤄 도시로 떠난 후 일요일에 내려올 자식들을 늘
기다림의 연속으로 낙을 삼으셨지요.
살만하시니 신경변성 치매로 어머니는 당신의 할 일을 잊고 계셨어요.
어머니의 미소와 말씀, 그리고 기억을 빼앗아 가려는 아주 고약한 놈이었어요.
새벽기도를 가신다는 분이 겨울날 동이 트기 훨씬 전 남의 텃밭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계시어 자칫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동사할 위험도 있었지요.
좋다는 약을 다 구해다 드려 그런대로 더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가 있었답니다.
당신이 제대로 음식을 챙겨 잡수지를 못하시니 너무 기력이 쇄진하여
일정액의 보수를 드리며 주의의 몇몇 분에게 도움을 청하였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시골정서상 남의 집 살림을 해준다는 식모라는 주위의 눈총에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가버리더군요.
사촌 형수님에게도 부탁하였건만 이마저 오래가지 못하더군요.
부모님은 고향을 두고 떠날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답니다.
자식이 많은 들 맞벌이라고 당번 때면 찾기에 별 도움이 못되었지요.
그래도 아들내외가 왔다고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어머니,
점심을 사드리고 돌아서는 길을 잠시라도 더 붙들고 싶으셔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놓고 시간을 끄시던 어머니,
“엄마 나 이제 갈게.” 하고 손을 잡으니 얇고 가벼운 손을 놓지 못하고
바르르 떠시던 어머니,
차마 돌아서기 어려워 다시 또 한 번 차에서 내려 뺨을 어루만지니
어린아이처럼 내 두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시던 어머니가 백미러 너머로
눈가를 훔치시는 모습에 저 또한 가슴이 무너져 눈치 챌까 집사람 몰래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요.
어머니, 이제 울지 마세요.
엎어져도 코 달거리에 제가 있어요.
남들은 말년을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 간다고 난리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행도 한답니다.
부디 구구 팔팔 건강하게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이대로도 좋으니 제발 오래
머물러 주세요.
고향의 이별이라 말씀하지 마세요.
어디든 정들면 살기마련이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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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101)님의 댓글
<EMBED src="http://jk13.codns.com/video/mp3new1/Anack-Freddie Aguilar.wma"
width=50 height=30 loop=-1>...Anack / Freddie Aguilar <br>
용혁님네 형제분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셨네요. <br>
따님 근처에 계시는 것이 부모님들껜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br>
그래서 그런가,남아선호도 많이 줄었어요.
진우곤님의 댓글
가슴이 아리는군요. 더군다나 고향이라는 의미가 더더욱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지요. 즉, 마음의 고향을....... 현대인들은 마음의 고향을 염두에 두지 못한 채 치열한 경쟁으로 상처를 입기가 태반이요, 누구에겐가 위로와 평안을 받고 싶어도 마땅한 것이 없지요.
오윤제님의 댓글
한쪽 시력을 잃으신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눈
까만 나팔곷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정호승 시인의 시가 있어 적어 봅니다.그리고 어느 시인은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하는군요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출근하자마자 용혁후배의 가슴아린 절절함을 느꼈다오..고향은 떠나있어도 항상 마음에 남는 법..그래서 마음의 고향이라 하지 않나요..
윤용혁님의 댓글
김태희님,
늘 감사합니다.달리 방도가 없었답니다.
그저 잘 적응하시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뿐이지요.
그래서 딸이 더 예쁜가 봅니다. 고운 시간 되세요ㅣ.
윤용혁님의 댓글
진우곤 선배님,
수구초심, 고향은 언제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든답니다. 마음이 상처로 아플때 고향을 그리면 평정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선배님의 고운 글 늘 열심히 느끼며 언제나 건필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오윤제 선배님,
정호승시인의 그 말씀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나팔꽃씨는 극도의 사하제로 엉청 설사로 고통을 주지요.
눈을 상실하신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때 자식의 마음은
저려오겠지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인문형님,말씀대로 고향은 늘 가슴한켠에 크게 자리하지요.
목요일날 인주옥에서 뵙겠습니다.
오늘도 뜻있는 하루가 되세요.
조한용(69회)님의 댓글
윤약사 항상 마음으로 올리는 글모임이 그어느 미사여구 보다도 우리곁에 더욱 다가오는 구려 계속해서 주변에서 흘려보내는 우리의 일상을 느끼게 해주구려, 그리고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시고,ㅎㅎㅎㅎㅎㅎ
차안수님의 댓글
연수동에서 14년 살고 얼마전에 남동구로 이사 했더니 아침 저녁으로 적응에 애을 먹고 있습니다. 이제 이사는 그만가야지 하는데 정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와! 한용형님이 드디어 인고 홈피에 출현하시니 장안이 발칵 뒤집어 집니다.
어서 오세요. 형님! 그간 어디에 계셨어요? 인고 야구사랑들 모교사랑에 남달리
열의를 보내시는 희망의 형님이시죠. 일요일 체육대회에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뵈니 아주 반가웠답니다. 조회장님!
윤용혁님의 댓글
안수후배님, 연수구에서 14년 살다 이사를 했군요. 그 마음 조금은 알것 같으오.
정들면 고향이라니 어디든 열심이 잘 살길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