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 - 나팔꽃과 코스모스
작성자 : 진우곤(74)
작성일 : 2007.02.16 14:35
조회수 : 1,407
본문
세상을 자기 잣대로만 본다면 별로 얻는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자신의 잣대로 나를 바라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금이 틀리면 불쾌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지금의 세태가 바로 그짝입니다. 공동체라는 게 무너지고 이기심으로 가득찬 개인주의 앞에서 가슴이 서늘할 때가 있습니다. 가슴을 열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젠 흔치 않습니다. 이러매 때때로 세상이 낯설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저마다 고향으로 달려가기 위해 바쁠 겝니다. 가슴조차 설레이기도 할 테고.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고향. 때가 낀 마음들을 모조리 떨쳐내고 찰진 고향의 흙이라도 한 움큼 쥐고 돌아올 수 있다면 .......
설 연휴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나팔꽃과 코스모스
진 우 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조석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여간 반갑지 않다. 까마득히 높아만 가는 쪽빛 하늘과 그지없이 맑은 냇물. 여러 가지 물감을 흩뿌린 듯 고운 단풍으로 뒤덮인 산. 어디를 둘러 보아도 마음 한 켠에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넘실거림을 느낀다.
요 며칠 전의 일이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천변을 걷다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접한 매우 이색적인 광경에 한참이고 발을 멈춘 적이 있었다. 다름아닌 나팔꽃 덩굴이 가냘픈 코스모스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간 모습이었다. 한 송이의 붉은색 나팔꽃이 흰색의 코스모스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양에 아니 저럴 수가 하고 눈이 휘둥그래지며 카메라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찍고 싶을 정도였다.
만일 그 모습이 소가 닭 보듯 한 것이었다면 그저 그런 양으로 무덤덤하게 여기고 지나쳐버렸을 게다. 어쩌면 마치 갓 쓰고 자전거를 타는 격이요, 짚신에 구슬 감기처럼 뭔가 격에 맞지 않다고 지레 단정을 내리며,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부조화가 따로 없어 하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나팔꽃은 밤중에 부드러운 달빛과 맑은 이슬을 먹고 피어나지만 그것의 특징은 감아올라 갈 데가 있으면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는다. 주택의 담장은 물론이요 땅에 막대기만 꽂아 놓아도 거침없이 제 능력을 발휘하는 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코스모스의 사정 따위는 전혀 헤아리지 않고 저 좋을 대로만 하다니 하고 처음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혀를 찼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바로 그 짝이었다. 그러나 그게 가당한 일인가. 심히 나팔꽃에 대한 미운 감정이 불일 듯 일어났다.
아닌 게 아니라 코스모스 입장에서도 여간 불쾌하지 않을 게다. 한 줄기 바람결에도 맥없이 흔들리는 판인데 어쩌자고 자신의 가냘픈 허리를 휘감고 올라와서 짐을 지우는가. 마치 엎어진 놈 꼭뒤 차기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은 맹랑한 짓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할 게다. 어쩌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지도 않은 어린애가 자꾸만 귀찮게 개기는 것처럼 신경질도 나지 않겠는가.
그런 속사정이야 내 짐작에 불과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나팔꽃과 코스모스가 마주 바라보는 모습을 눈여겨보니 하마터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눈이 등잔처럼 크게 떠짐을 어쩌지 못했다. 까닭인즉 그 모습은 나 같은 속인이 섣불리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설사 우연의 일치라고는 해도 그들의 모습은 의좋은 형제 혹은 남녀간의 애틋한 정감이 오고 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따라서 한쪽으로만 생각이 기울 수 없다는 하나의 당위성을 갖게 되어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단 나팔꽃의 입장으로 돌아가보았다. 즉, 굼벵이도 생각이 있어 떨어지듯이 나팔꽃도 나름대로 어떤 의도가 있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로서는 코스모스가 늘 바람에 흔들리는 가련한 모습을 숱하게 보아온 터다. 따라서 자신이 그 허리를 감아줌으로써 다소나마 튼튼하게 서있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는 갸륵한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따라서 마땅히 제 할 일을 다했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러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금의 세상은 남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의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자들로 우글거리고 있다. 물론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할 정도 생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러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못났다고 지레 털어놓지 않는다.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며 쥐꼬리만한 실력이나 재주를 가지고도 젠 체 떠벌리고, 자기과시를 위해 눈에 불을 겨기 일쑤다. 지위가 조금만 올라가도 명함을 화려하게 새기기에 급급하고, 코딱지만한 사업을 해도 무슨 대표, 무슨 대표이사라고 큼지막하게 쓴 명함을 선뜻 내밀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듯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마다 제 잘난 멋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대감 죽은 데는 안 가도 말 죽은 데는 간다는 말처럼 인심은 다분히 에누리를 허용치 않으려는 실리위주에 흐르고 있다. 가령 남에게 조그만 은혜라도 베풀면 꼭 보답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릴 만큼 자로 잰 듯 계산에 밝다. 이런 야박한 심성들은 오늘도 눈만 뜨면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 이득이 생길 만한 구석은 송사리들처럼 떼 몰려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따라서 자신에게 손톱만큼도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민첩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런 염량세태에 때때로 기가 질리기도 한다.
늘그막에 배웠지만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테니스를 즐겨 치러 다니는, 우리와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다. 처음 서너 번 테니스장에 갔을 때인데 입맛이 사뭇 쓴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운동을 하고 나면 간식을 먹는다든지 식사를 하러 가게 된다. 그때마다 자신에게는 빈말이라도 같이 가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끼리끼리 모여가더라는 게 아닌가.
처음엔 신입 회원이어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매번 그러함에 아차 발을 잘못 들여놓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즉, 누군가가 X 단지 모여 하고 소리를 치면 삼삼오오 모여서는 어디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 X 단지는 유명인사나 기업가, 혹은 고위공직자들이 많이 사는, 한 도시 내에서 이름값을 하는 아파트로 통하고 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공공연하게 차별을 두는 그들의 처사에 맥이 풀리고, 자존심도 이만저만 상하지 않았다. 단지 동일한 레벨을 가진 부자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개밥에 도토리처럼 따돌림을 당하는 것에 구역질을 느껴 그녀는 오래지 않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테니스장을 찾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수긍이 갔다. 내 근무처가 서울 강남구에 있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이름값을 하는 대형 고층 아파트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은 아파트와 그 값이 나와 같은 서민이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엄청나게 비쌈에 혀를 내둘렀다. 구중궁궐이라 할 만큼 출입에 대한 보안도 철두철미해서 까다로운 단계를 몇 번 거쳐야 한다니 그들만의 잔치라는 말 그대로다. 별천지 같은 호화찬란한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본 적도 있지만 만일 까마득히 높은 층에서 신생아가 태어난다면 하늘에서 낳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땅 냄새를 맡기가 드물 터이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우연찮게 접한 나팔꽃과 코스모스가 마주 바라보는 모습. 서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흡사 심금을 울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에 새겨졌다. 부조화 속의 조화랄까, 아무튼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일깨우는 멋진 광경이어서 흡사 가뭄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속이 후련했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발걸음이 여간 가볍지 않았다.
점점 낯설어지는 세상이다. 이웃 사촌이 언제 적 얘기냐며 메말라가는 인심이 그렇고, 제 것은 작아도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불행엔 눈감아버리는 염량세태가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 흐름 앞에 나만 어수룩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아, 언제 우리 사회도 나팔꽃과 코스모스의 어울림처럼 잘살든 못살든 서로 함께 어울려서 훈훈한 인간미가 풍기는 살맛 나는 시절이 오게 될까. 너도나도 잘났다고 우기며 으스댈 게 아니라 부조화 속에서도 조화를 찾는 따뜻한 마음들이 절실하게 그립기만 하다.
(2006년 9월)
지금의 세태가 바로 그짝입니다. 공동체라는 게 무너지고 이기심으로 가득찬 개인주의 앞에서 가슴이 서늘할 때가 있습니다. 가슴을 열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젠 흔치 않습니다. 이러매 때때로 세상이 낯설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저마다 고향으로 달려가기 위해 바쁠 겝니다. 가슴조차 설레이기도 할 테고.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고향. 때가 낀 마음들을 모조리 떨쳐내고 찰진 고향의 흙이라도 한 움큼 쥐고 돌아올 수 있다면 .......
설 연휴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나팔꽃과 코스모스
진 우 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조석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여간 반갑지 않다. 까마득히 높아만 가는 쪽빛 하늘과 그지없이 맑은 냇물. 여러 가지 물감을 흩뿌린 듯 고운 단풍으로 뒤덮인 산. 어디를 둘러 보아도 마음 한 켠에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넘실거림을 느낀다.
요 며칠 전의 일이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천변을 걷다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접한 매우 이색적인 광경에 한참이고 발을 멈춘 적이 있었다. 다름아닌 나팔꽃 덩굴이 가냘픈 코스모스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간 모습이었다. 한 송이의 붉은색 나팔꽃이 흰색의 코스모스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양에 아니 저럴 수가 하고 눈이 휘둥그래지며 카메라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찍고 싶을 정도였다.
만일 그 모습이 소가 닭 보듯 한 것이었다면 그저 그런 양으로 무덤덤하게 여기고 지나쳐버렸을 게다. 어쩌면 마치 갓 쓰고 자전거를 타는 격이요, 짚신에 구슬 감기처럼 뭔가 격에 맞지 않다고 지레 단정을 내리며,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부조화가 따로 없어 하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나팔꽃은 밤중에 부드러운 달빛과 맑은 이슬을 먹고 피어나지만 그것의 특징은 감아올라 갈 데가 있으면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는다. 주택의 담장은 물론이요 땅에 막대기만 꽂아 놓아도 거침없이 제 능력을 발휘하는 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코스모스의 사정 따위는 전혀 헤아리지 않고 저 좋을 대로만 하다니 하고 처음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혀를 찼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바로 그 짝이었다. 그러나 그게 가당한 일인가. 심히 나팔꽃에 대한 미운 감정이 불일 듯 일어났다.
아닌 게 아니라 코스모스 입장에서도 여간 불쾌하지 않을 게다. 한 줄기 바람결에도 맥없이 흔들리는 판인데 어쩌자고 자신의 가냘픈 허리를 휘감고 올라와서 짐을 지우는가. 마치 엎어진 놈 꼭뒤 차기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은 맹랑한 짓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할 게다. 어쩌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지도 않은 어린애가 자꾸만 귀찮게 개기는 것처럼 신경질도 나지 않겠는가.
그런 속사정이야 내 짐작에 불과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나팔꽃과 코스모스가 마주 바라보는 모습을 눈여겨보니 하마터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눈이 등잔처럼 크게 떠짐을 어쩌지 못했다. 까닭인즉 그 모습은 나 같은 속인이 섣불리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설사 우연의 일치라고는 해도 그들의 모습은 의좋은 형제 혹은 남녀간의 애틋한 정감이 오고 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따라서 한쪽으로만 생각이 기울 수 없다는 하나의 당위성을 갖게 되어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단 나팔꽃의 입장으로 돌아가보았다. 즉, 굼벵이도 생각이 있어 떨어지듯이 나팔꽃도 나름대로 어떤 의도가 있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로서는 코스모스가 늘 바람에 흔들리는 가련한 모습을 숱하게 보아온 터다. 따라서 자신이 그 허리를 감아줌으로써 다소나마 튼튼하게 서있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는 갸륵한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따라서 마땅히 제 할 일을 다했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러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금의 세상은 남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의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자들로 우글거리고 있다. 물론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할 정도 생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러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못났다고 지레 털어놓지 않는다.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며 쥐꼬리만한 실력이나 재주를 가지고도 젠 체 떠벌리고, 자기과시를 위해 눈에 불을 겨기 일쑤다. 지위가 조금만 올라가도 명함을 화려하게 새기기에 급급하고, 코딱지만한 사업을 해도 무슨 대표, 무슨 대표이사라고 큼지막하게 쓴 명함을 선뜻 내밀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듯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마다 제 잘난 멋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대감 죽은 데는 안 가도 말 죽은 데는 간다는 말처럼 인심은 다분히 에누리를 허용치 않으려는 실리위주에 흐르고 있다. 가령 남에게 조그만 은혜라도 베풀면 꼭 보답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릴 만큼 자로 잰 듯 계산에 밝다. 이런 야박한 심성들은 오늘도 눈만 뜨면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 이득이 생길 만한 구석은 송사리들처럼 떼 몰려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따라서 자신에게 손톱만큼도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민첩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런 염량세태에 때때로 기가 질리기도 한다.
늘그막에 배웠지만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테니스를 즐겨 치러 다니는, 우리와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다. 처음 서너 번 테니스장에 갔을 때인데 입맛이 사뭇 쓴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운동을 하고 나면 간식을 먹는다든지 식사를 하러 가게 된다. 그때마다 자신에게는 빈말이라도 같이 가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끼리끼리 모여가더라는 게 아닌가.
처음엔 신입 회원이어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매번 그러함에 아차 발을 잘못 들여놓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즉, 누군가가 X 단지 모여 하고 소리를 치면 삼삼오오 모여서는 어디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 X 단지는 유명인사나 기업가, 혹은 고위공직자들이 많이 사는, 한 도시 내에서 이름값을 하는 아파트로 통하고 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공공연하게 차별을 두는 그들의 처사에 맥이 풀리고, 자존심도 이만저만 상하지 않았다. 단지 동일한 레벨을 가진 부자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개밥에 도토리처럼 따돌림을 당하는 것에 구역질을 느껴 그녀는 오래지 않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테니스장을 찾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수긍이 갔다. 내 근무처가 서울 강남구에 있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이름값을 하는 대형 고층 아파트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은 아파트와 그 값이 나와 같은 서민이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엄청나게 비쌈에 혀를 내둘렀다. 구중궁궐이라 할 만큼 출입에 대한 보안도 철두철미해서 까다로운 단계를 몇 번 거쳐야 한다니 그들만의 잔치라는 말 그대로다. 별천지 같은 호화찬란한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본 적도 있지만 만일 까마득히 높은 층에서 신생아가 태어난다면 하늘에서 낳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땅 냄새를 맡기가 드물 터이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우연찮게 접한 나팔꽃과 코스모스가 마주 바라보는 모습. 서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흡사 심금을 울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에 새겨졌다. 부조화 속의 조화랄까, 아무튼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일깨우는 멋진 광경이어서 흡사 가뭄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속이 후련했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발걸음이 여간 가볍지 않았다.
점점 낯설어지는 세상이다. 이웃 사촌이 언제 적 얘기냐며 메말라가는 인심이 그렇고, 제 것은 작아도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불행엔 눈감아버리는 염량세태가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 흐름 앞에 나만 어수룩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아, 언제 우리 사회도 나팔꽃과 코스모스의 어울림처럼 잘살든 못살든 서로 함께 어울려서 훈훈한 인간미가 풍기는 살맛 나는 시절이 오게 될까. 너도나도 잘났다고 우기며 으스댈 게 아니라 부조화 속에서도 조화를 찾는 따뜻한 마음들이 절실하게 그립기만 하다.
(2006년 9월)
댓글목록 0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돋보기 써얄듯...인문님 어쩌지?
윤인문(74회)님의 댓글
화면 해상도 1152 X 864 에서는 큼직하게 잘보이는 뎁쇼..내컴퓨터 제어판 디스플레이 설정에서 한번 조정해 보시죠..
윤용혁님의 댓글
두꽃의 어울림처럼 훈훈한 인간의 정을 느끼며 배려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선배님의 좋은 글에 수긍하며 많은 것을 생각케 하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