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 - 자판기 앞에서
본문
숨가쁘게 달려왔던 올 한해.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노라니 왼지 모르게 숙연해집니다.
년초에 세웠던 계획들이 뜻대로 이루어진 것도 있고, 바빠서 미처 손을 대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늘 언제나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게 삶인가 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수레가 마루를 넘은 듯 세월이 빠르게 흐름을 절감합니다. 체력도 예전
만 같지 못함에 마음은 청춘이라고 내세우며 발버둥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희끗희끗 늘
어나는 머리카락과 눈가의 주름 앞에 무엇에 쫓기는 듯 다급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흐름은 눈부신 과학문명과 정보혁명의 발달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제대로
판단할 여가가 없는 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 날로
메말라가거나 황폐해지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바음 한 켠에는 진실과 순수가 살아 숨쉬는 정다운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언제 만나더라도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
까. 그러나 점점 험악해지는 세상이라 그런 사람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바로 당신이었으면.......
다음은 예전에 발표했던 작품으로서 날로 팽배해지는 물질주의 앞에 느낀 감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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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이따금 길을 가다가 커피를 마시고픈 생각에 자판기를 이용할 때가 있다.
한번은 동전이 없어 천 원짜리 지폐를 자판기에 넣고 3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뽑았다. 동전 반환 표시기에는 잔돈 700원이 남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에 잔돈 반환 버튼을 돌리자 동전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반환 통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을 집어넣자 이게 웬일인가. 동전이 수북이 쌓였다는 느낌이 왔고 전부 꺼내보니 1,400원이나 되었다. 뜻하지 않은 횡재(?) 앞에 긴장감이 전신에 퍼지며 가슴마저 뛰기조차 했다. 손에 쥔 1,400원. 꿩 먹고 알 먹고요,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그래서 일까 커피 맛이 그 어느 때보다 감미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커피를 다 마신 후 자판기 앞을 떠나려는데 뭔가 찜찜했다. 나도 별수없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에 덜컥 걸려든 소인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기실 내가 돌려야 받아야 할 거스름돈은 700원이다. 그렇다면 덤으로 얻은 700원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남들이 하는 대로 오늘의 재물 운이 좋은가 보다 여기고 스스럼없이 호주머니에 넣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흡사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발걸음이 멈칫멈칫해지고 뒤통수가 긁적거려지는 게 아닌가. 이를 두고 새 발의 피처럼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모기 보고 칼 빼기처럼 호들갑을 떠느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영 개운치 않았다. 다름아닌 그 놈의 자판기로부터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돌려 받아야 할 돈은 틀림없는 700원인데 자판기는 어쩌자고 내게 덤으로 700원을 안겨 묘한 기분을 유발케 한 것일까. 애당초 천 원짜리 지폐를 넣으면서 맺었던 나와의 약속을 보기 좋게 깨버린 그 놈의 자판기.
그렇다고 자판기만을 전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내게 잔돈 700원이 남았음을 알려주지 않았던가. 따라서 자판기로서는 나름대로 제 소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700원의 불로소득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보다 앞선 이용자 중 누군가가 잔돈을 찾아가지 않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즉, 그 사람에게 돌아갈 잔돈을 내가 받은 셈이 된다. 그렇다고 700원의 주인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것은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나 다름없다.
물론 양심의 가책으로 그 700원을 반환 통에 도로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혹시 나 다음의 이용자가 반환 통에서 덤으로 나온 700원을 두고 어떤 생각이나 태도를 취할지 모르지 않는가. 만일 그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처리할까 난감해 한다면 나로서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의무를 게을리한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반대로 그가 허, 이게 웬 떡 하고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700원을 쾌히 호주머니에 넣는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즉, 옛날에 한 농부가 뛰어 오던 토끼가 나무등걸에 걸려 죽은 것을 보고, 그 다음날도 그 장소에서 토끼가 다시 나무등걸에 걸리기를 마냥 기다렸다는 고사인 '수주대토(守株待兎)' 같이 얄팍한 속셈에 그가 길들여진다면 그런 빌미를 제공한 나의 책임 또한 크지 않겠는가.
나는 결국 이런저런 망설임 끝에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르는 격으로 덤으로 얻은 700원을 호주머니에서 도로 꺼내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엔 영 틀렸군 하고 풀썩 웃으며 말이다. 그러면서 금일에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호사다마였다. 그날 또 다른 자판기를 이용할 기회가 있어 동전 500을 넣고 3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뽑아먹었다. 하지만 잔돈을 챙기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것이 생각난 것은 그 자리를 떠난 지 한참 지난 후였다. 이에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세상일이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는 올바르지 않은 내 마음가짐이 빚어낸 자업자득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따라서 째째하게 손해를 본 200원을 찾으러 가는 소인배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수중에 들어가고도 남을 일일 테니까. 과연 그는 200원의 횡재(?) 앞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결국 그날의 손익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말미암아 얻은 700원의 불로소득에서 나의 자판기 이용의 실수에 의한 손해 비용 200원을 빼면 대차대조표상으로는 그래도 500원이나 수익이 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700원의 불로소득에 대한 정신적 수고 비용 - 가질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고민과 갈등 - 과 내 실수에 의한 200원의 손해가 끼친 불유쾌한 감정을 어찌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인가. 대차대조표상 500원이라는 수익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액면 그대로의 수익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하는 게 더 나을성싶다.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결국 자판기 제조회사에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미쳤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버튼 천지다. 즉, 버튼 하나에 따라 신용이 왔다, 갔다 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기계와 이용자와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기계의 오작동으로 곤욕을 치를 수도 있고, 이용자의 버튼 사용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사고가 발생하거나 혹은 금전상 손해를 보는 일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고 보면 자판기와 나는 판매자와 고객이라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가령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내가 거스름돈을 미처 챙기지 못했을 때를 가상해보자. 진정 고객을 위한다면 단지 육안 식별용의 표시기에 잔돈이 얼마라고 알려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노라고 자처할 게 아니라 최소한 이용자가 귀로 들을 수 있도록 경고음 – 음악소리나 ‘잔돈 찾아가세요’ 라는 코멘트 등 - 을 단 10초간만이라도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자판기 제조회사가 한번쯤 고려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기(史記)>의 ‘상군전(商君傳)’과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도불습유(道不拾遺)'라는 말이 있다. 이는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 것이 아니면 절대로 탐내지 않을 만큼 나라가 태평하게 잘 다스려짐을 비유한 것이다. 거기엔 상호간에 믿음으로 가득 차있고, 평화를 구가하는 아름다운 마음과 질서가 반듯하게 잡혀있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월이 어디 그런가. 남의 것을 빼앗거나 가로채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하고 제 몫을 챙기기에 혈안이다. 계산기보다 더 정확한 이해 타산으로 얽히는 인간 관계가 그렇고,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맹목적일 만큼 물질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사람 - 혹은 인격까지도 - 을 평가하는 잣대를 삼는 게 그렇다.
이렇듯 실리주의가 판치고 있다 보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던 예의와 염치, 혹은 겸손은 냉대와 무시를 당하기 십상이다. 또,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이 점점 만연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정도(正道)와 상식의 고수만으로 처세했다가는 밥을 빌어먹거나 굶고 지내기가 십상이라고 입방아를 찧거나 눈총 주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심을 점점 메마르게 하고, 영혼 또한 사막처럼 황폐화되어 가게 하는 요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과거 사회질서 유지의 근간이었던 전통적인 가치관이 갈수록 여지없이 무너지는 탓일까 이따금 세상이 낯설게 느껴져 가슴이 시려지기도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손에 들면서 잠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예전에 경험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도불습유(道不拾遺)' 와 '성인도 시속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와, 버튼 하나로 거대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는 내 모습이 수시로 커피 잔에 어른거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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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학90님의 댓글
정도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요....쩝...
이동열님의 댓글
한편,,,일본의 예를 들면 일본의 산에는 무인산장이 많은데 거기에는 선반에 담요,비상식등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지로를 이용해서 요금을 입금 시켜야 되는데 그 회수율이 90%에 이른다니 일본 사람들은 정도로 사는 국민들일까,,,,하는 생각도 드네여,,,좋은글 자주 올려주시길,,,,감사^^
이동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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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74회)님의 댓글
우곤이! 자네야말로 진실과 순수가 살아 숨쉬는 사람일세..우리 모두가 공감을 느끼는 글에 찬사를 보내네..
바람님의 댓글
바람이 전하는 말인가요? 늦은밤 듣기에 아주 좋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상동님의 댓글
열쒸미 차카게살자... 맞나요? 선배님...
이기석님의 댓글
띵한기서기는 글쎄~~~~~~~!! 아무생각이 없을을것 같습니다,,,,진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