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 - 미생지신(尾生之信)
본문
세월을 낭비한 그들임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집권하겠다는 여당과 더 이상 눈 뜨고 못 봐 주겠다며 정권을 바꾸자고
호소하는 야당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몇 년 동안 정치에 식상한 나이고 보니 그런 풍경도 별로 구미에 당기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정치의 본질은 국민들을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하면 그 이상 없는데 어쩌자고 선량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윽박지르고
고난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일에 광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당리당략만을 위해 존재하는 비겁하기 짝없는 정치.
국민들의 시린 가슴과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실효성이 없는 장밋빛 공약의 남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모습에 허송세월이 따로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야흐로 추운 겨울이 점점 깊어가는데 아직도 헛발을 디딘 채 허우적거리는 정치권.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줄 모르고 제 잘났다고 우기며 으스대는 모습. 그게 바로 정치의 속성인가.
이렇듯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대한민국호'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다음의 작품은 말만 번드르하게 늘어놓고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도 변명일색이요, 책임전가를 일삼던 시절 -
지금도 구역질나는 그 수법이야 여전하지만 - 의 정치권의 모습을 비판하여 발표한 것으로 지금의 현 시국과 비교해도
별반 다를 게 없으리라 봅니다.
약속을 철두철미 지키는 '미생'. 과연 그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음을 사족으로 달아둡니다. 약속을 지켜지지 않는 정치.
이제 신물이 나기만 합니다.
겨울은 자꾸만 깊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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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 중국 노(魯)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약속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위인이었다.
어느날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개울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도 약속 시간에 늦는 일없이 만남의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거기서 아무리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도 그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밀물로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약속 장소에서 꼼짝 않고 상대방을 기다렸다.
이에 그의 몸은 불어나는 물에 점점 잠기게 되었다.
발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를 거쳐 가슴으로 말이다.
그렇게 물이 차 올라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꼭 그 여인이 찾아오리라 기대하면서.
물은 불어 급기야 머리 위까지 올라오게 되어도 그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뻗어 교각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교각을 잡은 손마저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물에 휩쓸려 익사해 버렸다고 한다. --
위 글은 ‘미생의 믿음’이란 뜻을 가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숙어에 관한 내용으로서 ‘장자(壯子)’의
‘도척편(盜跖篇)’에 실려있다.
비록 짤막한 글이지만 여기에도 단순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인생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 혹은 너무 고지식하여 임기응변의
변통이 없어서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을 빗대서 주로 쓰고 있다.
나는 그와 같은 뜻풀이에 대해 다소 견해를 달리하는 편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격처럼 느껴진다.
즉, 너무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 해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서두에 밝혀진 대로 매우 정직하였고, 약속만큼은 우직스럽게 반드시 지키며 살았던 그를
부관참시처럼 두 번 죽이는 꼴인 듯해 씁쓸함을 떨쳐낼 수가 없다.
과연 그의 처세가 죽어서도 세인들에게 냉소적인 조롱과 멸시를 받을 만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할 수 있을까.
즉, 당사자인 ‘미생’이라는 사내의 입장에 서 보지 않고서 말이다. 남의 일이라고 그와 같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해석한다는 것은 일종의 편파적인 시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미덥지 못하긴 하다.
나 역시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고 싶진 않다.
다만 이런 의문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 그가 물이 불어 머리 위까지 차 올라도 약속 장소인 다리 밑만을 고수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풀이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 ‘미생지신’이라는 고사숙어의
참된 맛이 제대로 우러나겠는가.
내용상 ‘미생’이 만나기로 한 여인이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글 속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아 공교롭게도 그날에 때 아닌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여인도 이 불순한 날씨에 ‘미생’이라는 사내가 설마 나타나겠느냐고
지레 짐작하고 약속을 어기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그 여인에게도 피치 못할 곡절이 있었다고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는 사람에 따라서 저마다의 상상이 구구할 수가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미생’이라는 한 사내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즉, 자신이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는 약속 장소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의 작용에 있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그 여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어 늦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좀더, 좀더 기다리자고 한 것이 결국
목숨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게라고 말이다.
만일 그마저 그 여인이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대뜸 원망하거나 투덜대며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떠났을 때를 가정해보자.
뒤늦게 여인이 그 약속 장소에 찾아와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르지 않겠느냐는 점을 헤아려
‘미생’은 자신이야 고생이 되더라도 더 기다려보자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런 정도의 가정을 감안한다면 그의 죽음을 두고 한낱 융통성이 없는 너무 고지식한 자의
소치로 매도하거나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질 여지를 남겨두는 게 인정상 옳다고 본다.
비록 그가 고지식하다 손치더라도 나름대로 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맞이했던 그의 죽음을 오히려 아름답고 숭고한 죽음으로 승화시켜 해석하는 것도
또 다른 의미를 자아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과 같이 ‘휴대폰’이나 ‘메일’이라는 통신수단이 원활치 못하던 시절의 얘기이니
어떻게 보면 ‘미생’이라는 사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휴대폰’으로 그 여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장소를 변경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을 게다.
까닭인즉 약속만큼은 철두철미 지키는 그의 성격상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그가
불가피하게 맞이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 역시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과의 약속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약속으로 먹고 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은 ‘신용사회’라고 일컫지 않는가.
사람에 대한 인격의 척도와 신용에 대한 판가름은 그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달려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려는 사람이 존경과 우대를 받는 시대다.
따라서 식언(食言)과 기만이 난무하는
혼란스런 작금에 있어서 사랑하는 한 여인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다 죽은 ‘미생’의 모습은
하나의 귀감으로 삼아야 함이 옳지 않을까.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심상치 않다.
특히 정치판은 더욱 그렇다. 국민이 혈세를 받친 만큼 정치를 하는 것인지 답답한 맘 금할 길 없다.
당초 국민을 위한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제 세력에 대한 감싸주기와
자리 안겨 주기에만 급급해 하는 꼴이란 사뭇 입맛을 쓰게 한다.
흡사 염불은 않고 젯밥에만 신경 쓰는 중처럼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다.
허구한 날 민의(民意)를 저버리고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하는 작태에 신물이 난다.
도대체 국민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쥐꼬리만큼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저 오만한 태도. 정치인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깔아뭉개는 숱한 공약들. 이러고서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표방할 수 있는가.
그저 자신들의 편리위주로 치닫는 위정자들의 수법에 혀가 내둘러질 판이다.
더구나 말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작태에 넌더리가 난다.
조변석개, 조삼모사, 아전인수 혹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별로 달갑지 않는 말들이
어우러져 춤을 출 때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오늘 아내가 아침부터 부산하다. 동창회에 나가야 한다면서도 굼뜬 행동에 화가 치민다.
내가 어림잡아도 약속 시간에 무척 늦어질 텐데도 그는 여유작작이다.
어서 약속 시간을 지켜 나가라 해도 벌컥 화를 내며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일랑 놓으란다.
까닭인즉 다른 친구들도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법이 없다는 게 아닌가.
이 대꾸에 나는 ‘미생지신’의 고사숙어를 떠올리며 풀썩 웃고 말았다.
(2004년 10월)
댓글목록 0
이동열님의 댓글
약속에 대한 글이군요,,,제자신을 돌아보는 시간,,,고맙습니다.
이동열님의 댓글
전체 글을 쫌 바꿨습니다. 보기 쉽게,,,이해해 주시리라,...
오윤제69회님의 댓글
시간 약속은 30분 아니 한시간 쯤 나중에 만나자는 묵계 속에 이루어 지는것이 아닙니까?
요즈음은 다르지만, 면박받을 말 골라 하고 나갑니다.
장재학90님의 댓글
미생지신.... 정치인도 한번 돌아봐야 하는데요...
윤용혁님의 댓글
코리언 타임이 만연화 되어 서로가 약속시간을 어기는 안타까운 상황이군요.
정치꾼들의 신의를 져버리고 국민과의 약속을 밥먹듯 어김에 질타를
하셨군요. 고맙습니다.
윤인문(74회)님의 댓글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람들=정치인 그렇게 쉽게 약속을 저버리니..ㅉㅉㅉ..누굴 믿고 살아야할지 한숨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