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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여름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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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고등학생 인 나와 대학생인 형은 어머니가 애써 길러온 인삼 밭이 잘 안되어 헐값에 팔아 넘긴 돈의 일부를 겨우 타내어 여름방학 때 설악산을 가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형의 돈 씀씀이가 미덥지 않으신지 내 팬티 속에 비상금 오천원을 실로 꿰어 주며
형에게 절대 말하지 말고 비상시에만 꺼내 쓰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형과 서울로 올라와 사진관에서 카메라도 빌리고 코펠 버너와 텐트를 챙기니 배낭이 차고 넘쳤다. 마장동에서 속초까지 가는 버스는 장장 열 시간을 넘게 걸려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설악산에 도착하니 주위는 온통 깜깜하다. 랜턴을 비춰가며 야영지를 찾아 가는데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한남자가 “보소!보소! 와 남의 얼굴에 비치고 그러는 겨”하며 시비를 해오니 참 난감하였다. 적당히 달래고 설악동 매점근처에 텐트를 치고 밥을 지으니 시간은 벌써 오후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석유버너도 처음 사용하는 관계로 처음부터 펌프질을 많이 하여 불을 피우니 시커먼 연기만 나고 밥은 설고 첫날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카우보이 복장의 형은 등산을 와서도 설악동 세탁소에 들러 와이셔츠에 주름을 잡고 가죽조끼를 받혀 입고서는 한껏 먹을 부렸다. 그러나 나는 교련복에 헐렁한 모자를 씌우니 폼도 안 나고 며칠을 그런 식으로 보내니 얼굴은 까맣게 타고 점점 거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사이 형은 친척집 매점에 내려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숙대 화학과에 다니는 여대생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난 안중에도 없다.
더운 여름날 혼자 텐트를 지켜가며 사랑에 빠진 형을 기다리자니 한심한 생각도 들고 집 생각도 나고 눈물이 났다. 용돈은 다 떨어져 가는데 형은 신이 나있다. 늘 나를 남겨두고 다닐 생각에 대청봉은 너무 힘들고 토왕성 폭포는 미끄러워서 안 된다고 텐트만을 지키라니
이게 무슨 여름 휴가이고 등산입니까?
몇 알 되지않는 김치는 쉬어 꼬부라지고 밥에다 통조림 식사는 식상한지 오래고 불편한 잠자리에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가본 곳이라고는 비룡폭포와 비선대 뿐이니 나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다른 대학생형들을 따라 등산에 나섰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했다.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등반을 하다가 정말 큰일 날뻔하였다.
돌아와보니 형은 보이지 않고 돈이 떨어져도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모든 것이 다 문제의 여대생 때문이라 생각하니 형도 그 여자도 모두가 싫어졌다. 드디어 나타난 형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얼마나 좋으랴 예쁜 여대생을 만났으니 동생이 굶든 떨어져 죽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낙산 해수욕장을 거쳐 강릉에 도착하니 수중에 돈은 한 사람만 간신히 서울 갈 차비와 서울시내버스 갈아탈 돈뿐이라며 나 먼저 집에 가서 설악동 우체국으로 돈을 부치라는 것이다.
아니면 빌려온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내 팬티 속에 비상금 오천원이 있다고 하니까 형은 반색을 하며 우선 더우니까 그 돈으로 수박을 사먹자고 한다. 형의 고집불통에 밀려 정말 큰 수박을 사서 둘이 먹으니 배가 불렀다.대책 없고 즉흥적인 형의 제안에 속수무책 따라 갈수 밖에 없었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자려는데 낮에 먹은 수박 때문인지 아니면 비상금을 써버린 걱정 때문인지 배가 아프기 시작 하면서 설사가 났다 .형도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잠을 못 이뤘다.. 나중에 귀찮아서 텐트 안에 모래를 파고 거기에다 큰일을 치루고 덮으니 그날 밤은 화장실에서 잠을 잔 거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형과 헤어져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타니 왜 그리 서글프고 집에 돌아가면 이 일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설명하며 그 뒤에 혼날 생각을 하니 하루종일 우울하였다.
차 안에는 남편과 함께 서울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가는 아주머니와 뒷좌석에 동승하게 되었는데 말끝마다 외치기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니 정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이 소리를 형이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피를 나눈 형제임에도 사랑에 눈이 멀어 동생을 홀로 떠나보내는 형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버스가 휴게소에 들렀을 때 남편이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며 그 아주머니의 손목을 꼭 붙들고 있으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난 무서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가 손목을 잡으니 그 시끄럽던 아주머니가 순한 양이 되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나의 처치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측은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낯선 학생이 손목을 잡아서 그랬는지 그 아주머니 정신이 오락 가락 하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형이 하숙 하던 친척집에서 강화에 내려가는 차비를 빌려 집에 오니 어머니 벌써부터 형에게 할 욕을 나에게 다 퍼붓고 단지 형을 따라 나선 것이 죄인이 되어 며칠을 어머니 잔소리에 보내게 되었다.
아 악몽의 여름휴가 내 다시는 가나 봐라 하며 굳게 다짐을 했건만 그래도 7월이 오면 오래전 여름날의 쓰라린 추억이 떠올라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댓글목록 0
강세흥님의 댓글
에잇! 나쁜 형, 용혁이는 참 좋은 사람이야~ ㅋㅋㅋ
1234님의 댓글
그런 추억도 가지고 계시군요... 진솔함이 묻어있는 글 감사합니다.
이동열(73)님의 댓글
정말 멋진....형과의 추억이네요. 직ㅁ 형하곤 잘 지내시겟지요?
이용구님의 댓글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데...옛말이 틀릴때도 있음을 용혁형님댁을 들여다 보면 알수 있답니다
불쌍한 둘째아들의 설움을 누가 아시렵니까?
차라리 저처럼 외아들로 태어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