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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오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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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5학년
1968년 3월초 아버지를 따라 추위가 덜 풀린 이른 아침 양도면 벌뜰 허허벌판을 지나 박골고개를 넘으니 파랗게 펼쳐진 내가 저수지가 보이고 내가 다닐 내가초교가 눈에 들어왔다.
2년 전 누나가 그랬듯이 인천중학교 진학을 목표로 아버지가 교감으로 재직하시던 내가 초교 5학년 1반으로 전학을 왔다.
양도초교에 다니던 형이 인천중학교에 갔으니 나도 형의 뒤를 이어 진학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속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 바로 옆 돌로 지은 아담한 교사전체를 5학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중 첫 번째가 1반 교실이였다.
우리반의 담임선생님은 첫 보기에 스모선수처럼 당당한 체격을 가지신 ‘이기엽’ 선생님이셨다. 목이 짧으셔서 보기에도 무서워 보였다.
5학년 1반 교실을 들어서니 왠 놈이 나타났나... 하는 호기심 어린 친구들의 표정을 엿 볼 수 있었다.
전학 첫 날부터 교실 바닥 청소가 시작되었다. 책상을 뒤로 한 다음 쓸고 닦고 초칠을 하여 바닥을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았다.
오후를 한참 넘기고 학교 사택으로 가니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식사를 하시던 중 갑자기 눈물을 훔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한테서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할 아들이 공부가 무언지 당신을 따라와 고생하는구나 하는 애처로운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던 것 같다.
어느 덧 학교생활에 적응할 쯤... 반에서 짖굳은 남자아이들이 나와 종훈이하고 싸움을 시켰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주걱턱 사나이 성배와 치과집 아들 덕수가 주동이 되어 정문 밖 산소갓에서 한판 붙기로 하고 막 나가려 하였다. 바로 그때 여학생들이 그 사실을 담임선생님에게 일러 그날 종훈이와 나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서너대씩 맞아야 했다.
나는 너무 서글퍼 엉엉 울었다. 회초리의 아픔보다도 텃새를 하는 친구들이 미웠고, 싸움의 영문도 모른 채 매를 맞은 것이 너무 억울하였다.
엉엉 울며 교무실로 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칠 생각이였다.
그러나 사나이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그냥 교무실 밖에서 울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물론 어느 선생님 하나 내다보시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이제부터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다.
학교 사택에서의 아버지와의 자취생활을 말하자면, 아버지가 퇴근하시기 전에 5학년의 어린 손으로 저녁쌀을 씻어 연탄불에 밥을 할려니 생전 처음하는 밥이라 물의 양을 조절할 줄 몰라 맨날 삼층밥을 짓곤 할 때, 이웃에 살던 ‘송태국’ 선생님의 딸인 6학년 은희누나가 찾아와 하는 말 ‘얘! 너희 누나가 그러는데 너네는 양도면 부자라 뻥튀기도 쌀 한 가마씩 튀긴다며?’ 하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시인도 부정도 못하다 씻던 쌀을 그만 연탄재가 수북한 바닥에 홀랑 쏟아뜨리고 말았다. 이를 어쩐다..... 챙피한 생각에 그냥 발로 그 많은 쌀을 비벼버렸다.
그래도 하얀 피부를 가진 예쁜 은희누나가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꼭 저녁을 할 때 쯤 누나가 찾아오는 바람에 내가 밥을 하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웠다.
밑반찬으로 어머니가 싸주신 일주일분의 구운 망둥어는 얼마나 맛이 있던지 이것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은 뚝딱 먹어치울 정도였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식사때 배당해주는 망둥어의 양만 가지고는 늘 성에 차지 않았다.
식사 도중 아버지께서 부엌으로 숭늉을 가질러 나가신 틈을 이용해 잽싸게 벽장에 있던 망둥어 한 마리를 꺼내 먹고 시치미를 뚝 뗐으나,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너 망둥어 꺼내 먹었구나!’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반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니 학교생활이 차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잘생긴 덕수는 치과집 아들답게 국소마취용 주사제병을 가져다 딱총으로 쓰라고 나눠주기고 하고, 고비에 살 던 국제는 공부도 잘하면서 늘 웃겨 친구가 많았다. 특히 늘 외로워하던 나를 잘 챙겨줘서 고맙게 여기던 마음씨 따뜻한 친구였다.
가끔 칡뿌리도 캐오고, 가을이면 상수리, 참다래, 밤알 들을 가져와 나눠주던 의리있는 친구였다.
상기라는 친구는 나를 집으로 초대하여 내가 저수지로 데리고 가 채 안에 된장을 넣어 피라미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늪에서 나는 까만 뿌리를 캐주곤 하였는데 지금도 까맣게 생긴 그 뿌리의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땋아 빨간 리본을 잘 매던 애영이는 그림그리기와 노래를 잘하여 합창반 활동시에 지휘를 도맡아 하는 눈이 참 예쁜 아이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우스운 성배는 주걱턱을 낼름거리며 나를 웃겼고 특히 단거리 육상으로 전강화 체육대회를 휩쓸었으며 종훈이는 고비 산길을 달리며 다져진 몸매로 마라톤을 참 잘하였다.
내가 시장 사진관 딸 인성이는 착하고 공부를 잘하였는데 ‘승공의 노래’로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하면서 연습을 같이 하는 사이에 친해지게 되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아이의 이간질로 인성이가 나랑 싸우면 나를 이긴다고 하기에 따졌더니 무작정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죽어라고 쫓아가 독서실 옆 쓰레기장에서 지쳐 헐덕이는 착한 인성이의 아랫도리를 발길로 걷어차는 사나이로서는 하여서는 안될 바보스런 행동을 저질렀다.
지금도 그 때 일을 후회하고 있으며 인성이를 다시 만난다면 그 당시 못했던 사과를 정중히 하고 싶다. 우리반은 아니었지만 준수한 외모에 외포리에서 다녔던 걸로 기억되는 영래는 축구를 참 잘하였던 친구였다. 해맑았던 고비에 살던 순정이, 학교앞에 살던 매력적이고 까마잡잡하던 피부를 가진 춘남이등 모두들 지금 다 어디서 살고 있을까?
당시 선생님들은 동네 사람들의 생일 초대를 많이 받으시고 술들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아버지도 술자리 회식 때문에 늦게 들어오실 때가 많았다. 그럴때면 저녁을 혼자 먹고 사택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이 무서워서 아랫마을에 사는 6학년인 건문이 형네 집에서 한참을 놀다가 형을 데리고 와 사택에서 잠을 자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한참 잠들어 있을 때, 아버지께서 제과점에서 사온 딸기쨈이 들어있는 롤케익을 잠결에 건문이 형과 나눠 먹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때론 엄하고 인자하셨던 담임 이기엽 선생님댁에서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뒤늦게 데려가곤 하였다.
건문이 형과 후레쉬를 가지고 밤에 초가지붕에 숨어있는 새 잡기 놀이가 있었는데 형이 나를 목마 태워주면 나는 초가지붕 밑에 구멍 난 곳을 비춰 손을 넣어 새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다. 왜냐하면 새의 푸덕거림도 두려웠지만 가끔 쥐가 들어있어 손가락을 물리는 동네 형을 본 적이 있기에 형의 목에서 흔들거리다 새는 한 마리도 못잡고 나의 새알 두 개만을 다쳐 아파서 쩔쩔매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장난꾸러기 후배 건창이가 내가 사는 학교 사택 소변기에 큰 일을 보아 속상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치우라고 야단을 쳤더니 부삽으로 떠서 나의 코에 들이 미는 정말 황당한 녀석이었다.
겨울 날 방죽에서 스케이트를 잘 탄다고 나는 거짓말을 하여 광열이가 그렇게 아끼던 스케이트를 타고 허둥되어 스케이트의 날을 망쳐놨던 일은 두고두고 챙피하였다.
학교 사택에서 잠을 잘 때면 운동장의 놀이기구가 바람에 부딪쳐 울릴 때 나는 정말 무서웠다. 또 추운 겨울 날 저수지가 얼었다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저수지의 물에 길이 나면 사람이 죽는다 하는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몰라도 해마다 저수지에서는 익사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친구들아! 그거 아니?
내가 저수지 배수로 근처 야트마한 산 언덕에 무덤이 훼손되어 삐져 나와있는 오래 된 관짝 말이다.
정말 무섭지 않았니?
추수가 다 끝나고 동네 어른들이 배수로를 막고 물을 펐을 때 엄청난 양의 메기와 뱀장어, 그리고 붕어를 두 세가마씩 잡던 그 시절 같이 호흡하고 뛰어 놀던 친구들아! 그립다.
다들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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