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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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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복숭아
60년대 중반 초등학생인 나는 여름방학이면 강화읍 둘째아버지 댁에 어머니를 졸라 놀러가 개학날이 다 되서야 집에 오곤 하였다.
둘째아버지는 당시 강화초교 교장선생님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사택에서
사셨는데 대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배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아주 건장한 체격에 두주불사형의 참 너그러우신 성격의 둘째아버지는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주셨는데 그 큰 키를 이용해 대문 앞 덜 익은 배도 한손으로 따서 건네주곤 하셨다.
둘째어머니가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큰 집 사촌누님이 와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고 있었다.
둘째아버지 댁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여동생이 있었는데 귀엽고 예쁘고 명랑하여 오빠인 나를 잘 따라줘 더욱더 방학이면 사촌 여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에 놀러가고자 하였다.
어쩌다 사촌 여동생이 나의 시골집에 들르면 어머니는 동생을 갓난아기 다루듯이 무릎에 앉혀 볼을 어루만지며 가끔은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와 생각하니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를 일찍 여윈 탓에 어린 사촌여동생이 너무 가엽고 불쌍하다고 생각을 하셨나 보다.
나의 시골집은 당시 전기도 안 들어와 침침한 등잔불에 코 속을 시커멓게 그을렸으나 읍에는 전기불이 들어와 너무나 환한 형광등빛에 나는 눈이 부셔 어지러울 정도였다.
생전 처음 보는 전기곤로에 불이 들어와 가열되면서 내는 띵띵띵 소리가 아주 신기하여 사촌누님을 부르며 축음기냐고 묻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누님은 할 말을 잃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촌누님이 점심에 끓여주는 왈순마라는 이름의 라면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가 없다.
감수성이 예민한 누님은 시집 한권을 들고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독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 총각이 누님에게 치근대며 데이트 신청을 하기에 혹시 누님을 빼앗길 새라 달려 내려와 당시 대학생이던 사촌 형님에게 고자질하곤 하였다.
밤이면 사촌누님이 그 총각에게서 받은 연애편지를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실어 낭독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개학날이 다가와 시골집으로 가야할 쯤 사촌누님은 꼭 나의 흰 고무신이 너무 낡았다며 읍내 시장에 데려가 신발을 고루셨다.
그러나 나는 흰 고무신보다 까만 운동화에 더욱더 눈길을 보내니 누님이 빙그레 웃으며 신발가게 아주머니에게 운동화 값을 물으니 흰 고무신보다 두 배는 더 비싸 결국 다음을 약속하고 흰 고무신을 사주었다. 그러면서 누런 종이봉투에 복숭아를 잔득 사서 버스터미널 까지 나를 배웅하였다. 누님이랑 또 사촌 여동생이랑 헤어지기 싫었으나 개학날이 다가오니 집에는 가야 하겠고 차창 밖으로 힘없이 손을 흔드니 버스는 사람들을 꽉 채우고 출발하였다.
하루에 서너 번뿐이 안다니는 버스는 만원으로 어디 의지해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털털거리는 시골길을 한창 달려 나의 시골마을에 도착하여 내리려 하니 도대체 몸을 비집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사이 복숭아를 담은 봉투가 툭 터지면서 복숭아가 우르르 쏟아져 버스바닥을 구루기 시작하였다. 나는 울상이 되어 복숭아를 주어 담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의 발에 채여 한 개도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하나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결국 새로 산 흰 고무신만 짓밟히며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 탐스럽던 복숭아, 먹을거리가 그렇게도 귀한 시절에 눈으로 보면서도 주워 담을 수 없던 복숭아를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주인을 원망하며 나뒹굴던 그 복숭아를 정말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사촌누님의 정성이 담긴 그 탐스러운 복숭아는 나를 져버린 채 어떤 낯선 사람들의 뱃속을 채웠거나 무참히 발에 밟혀 최후를 맞이하였으리라.
복숭아를 볼 때면 그 옛날 복숭아를 그리워하며 그 당시 마음 아픔에 내가 제 삼자라면 그렇게 몰라라 했을까 하는 생각에 어디서든 누가 어려움을 닥쳤을 때 최선을 다해 도와주리라는 마음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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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님의 댓글
유 선배님 맞습니다. 51년생 윤영무형이 둘째아버님의 둘째로서 저의 사촌형입니다. 정말 반갑고 새로운 사실에 선배님 한번 뵙고 싶습니다. 큰 사촌형이 윤영일입니다.
선배님 정말 고맙고 반갑습니다. 저의 약국전화가 524-5598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