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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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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정치학과에 다니며 진로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런지 자꾸 내 사주 팔자는
기술 쟁이라며 나의 진로를 문과에서 이과로 급조 하는 바람에 약대로 진학하였다.
그 당시 시골 출신이면 의례이 법대에 진학하여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양 여겨지던 시절 형의 일방적인 선택에 뚜렷한 대안이 없는 나는 형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 고교생활과 달리 대학신입생 생활은 고삐 풀린 망아지 모양 이곳 저곳 마구 기웃거렸다. 미팅,실험 반,약총,약창,중인약우회등의 모임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 중인약우회는 인천의 고교출신 중에 약대에 다니는 선후배 모임 중 학번 순으로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고 엄했다.
나는 권위적이고 강제적인 그런 문화가 싫어 안 나갔는데 어느날 입학 동기인 한 친구가 나를 데리러 왔다. 선배들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며 어떻게 든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끌려 간 곳이 약대 파이퍼홀 내에 있는 유기화학 반이라고 4층
구석진 곳에 있었다. 이곳에는 70학번 형들부터 그 아래 학번 순으로 쭈르르
시어머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0학번 형의 중인 약우회가 이래서야 되겠냐며 군기가 빠졌느니 어쩌니 하는 일장 연설이 끝나자 막내인 나보고 내려가서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다. 참 어이가 없고 가장 민주적이고 지성인들이 모인 공간에 몽둥이라니 기가 막혔다. 분위기에 눌려 천막을 치는 폴 대중 가장 굵은 것을 골라서 가져가니 선배형들 여기 저기서 죽었다는 듯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게 큰 폴 대를 가져가면 그 선배들도 차마 사람인데 이 걸로 설마 때리랴
생각하며 가져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형들이라 그런지 군대 용어를 써가며 줄빠따를 치고 줄줄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몽둥이는 춤을 추고 75학번쯤 내려 왔을까 역시 첫인상이 사람을 말해준다고 그 형이 몽둥이를 보기 좋게 우리 앞에서 꺾어버리며 앞으로 이런 비신사적이고 비인간적인 짓은 하지 말자고 하며 잘 해보자 한다.지옥에 문턱까지 갔다가 한대도 안 맞고 그 험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웬걸 학교 앞 학사 주점인 대구 집으로 모두 모이라는 것이다. 선배들이 미안하니까 단합대회를 겸해서 뒤풀이를 했는데 신입생 환영회 때 안받은 선배들의 축하주 공세에 만취가 되었다.
소주가 대여섯 잔 돌았을 때 빼빼 마른 70학번 형이 나서서 큰 대접에 막걸리 한 되를
따르더니 한숨에 들이키더니 빈 그릇을 머리에 툭툭 털고 나에게도 똑같이 술을 따라 마시게 하였다. 술을 ⅔가량 마셨을 까 이것을 다 마시면 내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입안 가득찬 막걸리를 나도 모르게 그 선배얼굴에 뿜어버린 것이다. 마침 그 선배는 나의 형과 제물포고교 친구 사이라 나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뭐 이런 새까만 후배가 있나 하고 어이가 없었나 보다.그 다음부터 나도 모르겠다. 선배들과 노량진 역까지 온 것은 생각나는데 집에 누가 데려다 주었는지 생각도 안 나고 말 그대로 필름이 끊어져 하루 반을 일어나지 못해 학교 강의까지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신입주라는 벌주를 먹이냐 하면은 약대공부는 정신 안 차리고 이처럼 술을 가까이 하면 분명히 낙제하여 졸업
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너무 지나쳤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동기가 있었으니 처음 나를 그 무시무시한 선배들에게 데려간 그 친구였다. 정말 소탈하고 따뜻하고 당구도 잘 치고 의협심도 강하여 덩치 큰 체육학과 복학생들이 학교 앞 주점에서 회식할 때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조용히 시키겠다고 올라간 또 다른 신입생동기를 말린다고 갔다가 싸움에 말려들어 그 멀쩡한 이빨 세 개가 부러져 주점 바닥에 나뒹구니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양쪽 다 학사경고를 받고 치과 치료비를 물어주는 조건 하에 가까스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 후 그 친구와 하계 봉사도 같이 가 모기와 빈대에 물려가면서 숱한 고생도 많았고 방학이면 나의 시골집에 내려와 논에 농약도 주고 그물로 고기도 잡고 시골 출신인 나를 많이 이해하고 속 깊은 고민도 주고 받는 마음씨 착하고 의리 있는 친구였다.
졸업 후 송림동 달동네에 약국을 개업하고 돈이 없어 약을 못 먹는 사람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돈이 모자라면 외상도 잘 주고 푼푼이 돈을 모아 남몰래 불우이웃에게 보내곤 하던 친구가 약국 연탄 방에서 잠을 자다 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그것도 내 결혼식에 참석을 하고 그 다음날 저녁에 잠을 자다 그런 큰일을 당하고 말았으니 나로서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충격에 사로 잡혔다. 내가 결혼식을 추운 겨울날 강화 읍 조그만 성당에서 할 때 피로연에 참석한 선배들이 집사람에게 노래를 청하였는데 그 친구만 유독 말없이 아주 먼 길을 떠날 친구처럼 손짓만하고 한마디 말이 없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날 친구의 사고 소식을 듣고 길병원으로 달려가니 이미 친구는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었다.엊그제 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던 친구가 아무 말없이 잠을 자는듯한 모습에 부르면 금방이라도 일어 날것 같았다.
사고 사로 사인을 밝힌다고 검사의 지휘 하에 부검을 하니 마니 난리니 그 친구는 죽어서도 떠나기 어려운가 보다.
유난히 정이 많고 술을 좋아하던 친구 술이 거나 해지면 “내가 왜 이럴까..오지않을 사람인데” 하며 시작하는“장미빛스카프” 노래를 곧 잘 부르곤 하던 친구가 길병원에 의사로 있던 그의 동생에 의해 시체가 수습되고 영안실로 인도되니 운명도 그런 기구한 운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날 친구 어머니의 꿈자리가 하도 뒤숭숭하여 약국에서 자지말고 집으로 들어와
자라는 어머니의 말씀만 들었어도 죽음의 잔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 어머니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모습에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변한 친구를 산에 뿌릴 때 선배와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래 친구야..잘 가라..” 인생이 다 그렇게 약속도 없이 떠나가는 것이지만 젊은 나이에 그 친구는 그렇게도 허무하게 나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운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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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님의 댓글
이글을 읽는 저의 마음도 찢어지려 하는데 절친한 친구인 형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시겠어요..언젠가는 우리도 그곳에서 만나리니 이곳에서 너무나 아픈모습으론 지내지 마세요(형님! 힘내세요 테니스가 있잖아요♬)
이상동님의 댓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