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목월 선생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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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2. 3.26)
목월 선생님
/( 856 )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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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청 시절, 필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때였다. 누구들처럼 객기어린 당선소감을 써 놓았던 건 아니지만 속으론 터무니없는 자신감까지 가졌었는데 당선통보 전보(電報)는 끝내 오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 오전 나절을 방에 틀어박혀 버둥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드니 선생님이셨다. "나, 목월이다. 여기 '동인천다방'인데 나온나." 정초에 웬일이신가 싶었다. 참외전거리를 뛰다시피해 다방에 도착했다.
이건청, 이승훈, 유윤식, 김종해, 마종기 등 선배시인들이 함께 와 계셨다. 아마도 정초 세배를 받으시다가 제자들과 바람을 쐐실 겸 인천나들이를 하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나를 보시자마자 자리를 옮겨 말씀을 이으셨다.
"신춘문예 낼 거면 말이라도 하지. 내, 니 작품 봤다. 남수씨(박남수 선생님)가 너 밀자는 걸 내 말렸다. 너는 내 밑에 안 있나? 나이도 어리고…알겠제?" 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당선보다 더 큰 선물을 주셨던 것이다.
그 후 군대를 마치고, 교사 초년병이었던 1975년 필자는 박목월 선생님이 창간하신 시잡지 '심상(心象)'의 신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 3년 후 하루는 선생님이 다음호에 '이달의 소시집'을 쓰라고 하셔서 당황해 했었다.
원래 문단원로들이 집필해 오신 난(欄)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라고 했더니, "아무 생각 말고 써 오레이" 하셨다. 생애 최초로 주어진 큰 지면이었다. 한 달여를 끙끙대다가 결국은 졸작 중의 졸작을 싣고 말았는데, 선생님은 그 달치 '심상'을 보시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1978년 3월24일이었다. '인연은 갈바람 같다'시던 선생님의 자애로우신 풍모가 불현듯 떠오르는 아침이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3월 2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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