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정승열(65회) 세상思 /한해를 바다로 보내며(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12.30)
세상思
한해를 바다로 보내며
/정승열인천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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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경제면에서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여러 번 우리나라에도 파고를 몰고 와 국민들을 힘들게 했다. 정치 분야도 갈등과 대립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불안하게 했던 한 해였다.
사회적으로는 저소득층의 무력감을 개선하지 못했고 특히 청년 실업 문제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다. 교육 분야도 제 길을 확립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으며 학생과 학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교사들의 사기 저하와 열정을 식게 만드는 한 해였다. 우리 인천시도 과도한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 나오느라 온 시민이 힘들었던 한 해였다.
그런 불안과 실망 그리고 갈등을 겪어오면서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치는 않았던 것이 또한 올해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기업과 그 기업들이 이루어 내는 수출은 아직도 우리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다.
열정적이고 주어진 일에 몰입하는 기질과 성실한 근성은 아직도 우리사회 안에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스스로가, 자원이 거의 없는 나라,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우리나라가 이 만큼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자긍심도 잃지 않고 있다.
이제 이러한 한 해의 묵은 공과를 꾸러미에 묶어 갑문을 열고 바다로 내 보내고 새로운 임진년의 꿈과 희망으로 갑문을 채워 보자. 인천이라는 도시는 처음 개항할 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도시였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 온 도시이다.
1883년 개항 당시 제물포는 황량한 어촌에 불과했다. 이러한 황무지에 도시 기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바로 갑문 건설 때문에 유민들이 몰려들어 오면서다. 개항과 더불어 제일 먼저 착수된 사업이 갑문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농업이 경제의 가장 큰 축이었던 그 당시에 인천에서는 갑문 건설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노동의 수입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비록 어렵고 힘든 삶이었으나 그 돈으로 양식을 사고 생필품을 사서 쓰며 정착해 살 수 있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1884~1911년까지 민자(民資) 또는 정부 투자로 인천항 개발 사업을 시행했고, 전천후(全天候) 하역 작업이 가능한 항만시설이 요구되었으므로 다시 1911년부터 10개년 계획 사업으로 제1독[船渠]이 축조되었다.
갑문이 축조된 후 인천에는 물류 창고가 지어지고 하역 작업에 필요한 많은 노동자가 인천으로 다시 유입되었다. 대형 정미소, 방직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노동 수요는 더욱 많아 졌다. 상점들이 생기고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인천은 급속도로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가며 성장했다.
이러한 인천의 도시 형성의 근원이 되는 사건이 갑문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의 갑문은 인천시민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에너지이며,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DNA라고 할 수 있다.
인천에는 또 하나 갑문이 만들어 졌다. 한강과 인천 앞바다를 잇는 경인 아라뱃길 끝에 갑문이 만들어져 새로운 물길을 트고 있다.
올 한 해가 우리 인천 시민에게 어려움을 주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런 어려움들을 꾸러미로 묶어 갑문을 통해 바다로 내 보내고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갑문을 채우며 임진년 새해를 맞이하자.
2011년 12월 3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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