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용자(龍字) 지명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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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2. 1. 2)
조우성의미추홀/
용자(龍字) 지명
( 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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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인천부 선창리(船倉里)는 제법 판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중구 내동, 경동, 답동, 사동, 신생동, 전동이 다 그 소속이었다. 오늘날의 중구 '용동(龍洞)'도 1903년 부내면을 만들 때 탄생한 동네이다.
애초의 지명도 '용동'이었다. 그것을 1904년 10월 부제(府制)를 실시할 때 '용리(龍里)'로 개정해 사용해 왔는데 1937년 일제가 제멋대로 왜식으로 '용운정(龍雲町)'이라 바꾸었던 것을 광복 후에 되돌려 놓았다.
인천의 또다른 '용(龍)'자 지명으로는 중구 '용유도(龍游島)'가 있다. '유'자가 '헤엄치다, 떠내려가다, 어슬렁거리다, 놀다, 여행하다, 사신(使臣)으로 가다, 사귀다' 같이 여러 뜻이 있어 풀이도 하기 나름이겠다.
20여 년 전 본보에 '인천지명고'를 연재했던 이훈익 선생은 "조선 순조 말부터 보이는 지명인데 용이 헤엄치는 모양이라 그리 불렀다"고 했다.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역사에 이름만으로 떠 있는 운명이 됐다.
남구의 '용현동(龍現洞)'도 '용'자 돌림 지명이다. 원래 다소면 소속으로 '비랑이', '비랭이' 등으로 불렸다. 1903년 독정리(篤丁里)와 (飛浪里)로 나뉘었다가 3년 뒤 다시 '독정리(讀亭里)와 비룡리(飛龍里)로 바꿨다.
1914년 동명을 개칭할 또 '용' 자와 '정' 자를 따 '용정리'라 했다. 1937년에는 일제가 왜식 정명인 '일지출정(日之出町)'을 강요했다. 광복 후에 옛 이름 '용골'에서 착안해 '용현'이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땅이름만 봐도 수월한 게 없는 세상살이다. 임진년, 용의 해가 밝았다. 보통 '용'이 아닌 '흑룡의 해'라지만 '운수대통'은 고사하고, 나라 안팎에 이는 풍파만이라도 잦아들기를 기원해 본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1월 02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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