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은?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11.29)
나채훈의 중국산책 /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은?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장성(長城)이라고 하면 마치 중원의 문명국이 북방 야만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추조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고, 만리장성이라 하면 곧 진시황이 연상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우선 장성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의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제위왕 9년(기원전 370) ‘조나라 사람이 우리에게 장성을 돌려주었다’고 적혀 있어 적어도 진시황보다는 150여 년 전부터 장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기』 「몽염열전(蒙恬列傳)」에 보면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마침내 몽염이 30만 백성의 선두에 서서 북으로 융적(戎狄)을 쫓고 하남을 수복했다. 그리고 장성을 쌓고 지형지세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는데 임조(감숙성) 땅에 이르렀다. 그 길이가 1만여 리다’고 했다. 이때의 축성은 전국 통일 이전 각국이 세웠던 장성을 서로 보강하고 연결시킨 것인데 그 위치도 오늘과는 크게 달랐다. 몽염이 세운 장성은 임조 땅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위치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구원(九原)까지 올라가 동쪽으로 향해 조양(造陽)으로 해서 양평(襄平 : 오늘의 심양)까지였다. 상당 부분이 토성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졌고 이후 명(明)대에 이르기까지 새로 축조되거나 보강되면서 당시보다는 훨씬 남쪽으로 내려와 동쪽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에 이른 것이 요즈음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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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압록강 가에 있는 단동(丹東)에 때 아닌 ‘만리장성 동쪽 기점’이라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이 출현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필자는 지난 주 ‘생활정치텃밭포럼’이 마련한 해외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 현지를 다녀왔는데 아무리 짝퉁 천국이라지만 이제는 역사 왜곡에 짝퉁 장성까지 만들고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가져다 붙이는데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박작성 / 호산산성 / 만리장성 동쪽 기점’을 한 세트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박작성은 어딘가?
― 당태종 이세민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다가 안시성에서 대패하여 물러난 때가 645년. 이후 당군이 간헐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계속 혼란시키다가 648년에는 설만철에게 3만 병력을 주어 압록강 어구로 쳐들어가 박작성(압록강 어구에서 100리. 구현성?)을 포위 공격했다. 처음의 전세는 그들에게 유리했으나 곧 인근의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구원군이 달려와 장수 고문의 인솔 하에 침략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도망친 설만철은 이후 벼슬을 박탈당하고 오지(광서성)로 유배당했다(『구당서』 권65 「설만철전」).
안시성 전투 이후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박작성 전투였다. 고구려인의 호국정신과 용맹을 기리는 역사의 기념비적인 곳이 바로 박작성이다. 오늘날 중국 당국의 고구려 산성 출입 폐쇄와 우리의 연구 부족으로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렵긴 하지만 지금 단동에서 말하는 호산산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조선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의 기록을 보아도 ‘의주(義州)에서 강을 건너면 겨우 수레 하나 통할 만한 숲길이 나 있고, 그 숲길을 빠져나가면 허허벌판, 여기에 국경 초소인 수자리 초막이 있고, 대략 20리쯤 올라가면 구련성(九連城 : 이곳을 박작성으로 보기도 한다)이 나오는데 성은 거의 허물어져 잡초만 무성했다’고 했다. 『明憲宗實錄』255 「成和 20年條」에 보면, 성화 15년(1479년)에 개원에서 압록강까지 520여 리에 요동 동부변장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명대 요동의 변장(邊牆)은 장성(長城)과 달리 흙이나 돌, 나무 및 산세에 따른 간이 장새(障塞)로 명과 여진, 거란의 영역을 나누어 표시한 사실상 국경선으로 당시 요동땅이 삼분(三分)됐음을 밝힌 물증일 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사신들의 기록은 계속된다. ‘건너편 의주땅 통군정(統軍亭)을 바라보면서 한 잔을 하고 중국 측 관문인 봉황성(鳳凰城) 책문까지는 대략 백리 길. 그곳까지 또다시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의 단동은 수자리 초막이 있던 곳에서 강줄기 따라 내려온 곳에 1903년 미청통상조약으로 개발이 되면서 안동(安東)이라는 지명을 얻고, 일제 때 대륙 침략의 교두보, 6·25전쟁 때는 중공군의 최전선 군수기지로 되었다가 1965년에 동방을 붉게 한다는 전초적 뜻이 담긴 단동으로 개명했다. 지금 단동은 북한과의 주요 통로이기도 하고, 인천과는 뱃길로 연결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새로운 경협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곳에 또 하나의 동북공정(?)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11년 11월 29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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