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강화·김포 (1)(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12. 5)
강화·김포 (1)
/( 809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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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전, 인천은 강화, 김포, 부평, 계양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부세(府勢)도 부평, 강화보다 열세였다. 하지만 '인천'이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판도가 하루아침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역사적 운명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은둔의 왕국 코리아'의 관문으로 급부상하자 인천은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새로운 거점도시가 되어갔다. 당시 청국, 일본, 영국, 러시아가 지금의 중구 일대에 영사관을 둔 것이 그 같은 사정을 말해 준다.
변화는 눈부셨다. 전 인구의 90여%가 농사에 매달려 살 때, 인천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신식 직업들이 탄생되었다. 부두, 정미소, 담배회사, 성냥공장, 호텔, 음식점, 전기회사, 우편국, 미두취인소 등이 새로운 일자리였다.
특히 영화학당을 필두로 한 신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자 서당에만 의존했던 부평, 강화, 김포 등지에서 자제들을 인천으로 유학 보냈고, 노소를 불문한 그 같은 인적 교류와 유대는 훗날 크고 향기로운 열매로 결실되었다.
예를 들어,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 작곡자인 한상억, 최영섭 선생, 우리나라 점자 창안자인 박두성 선생, 정치가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한 조봉암 선생은 강화 출신이지만, 인천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김포지역의 사정도 대동소이하다. 초점을 오늘의 현실에 맞춰 보아도 그렇다.
인천이 국내 제3의 대도시로 부상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던 최기선 전 시장, 인천시 서구청장을 지낸 전 농수산부 장관 유정복 의원, 인천지역 최대 일간지의 김정섭 회장 등이 다 김포 출신이다. 그렇듯 우리는 지난 세월을 오순도순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12월 05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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