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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현린(75회) 칼럼/불러도 대답 없을 때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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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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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 없을 때
-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 중에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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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도 사주고, 경치 좋은 곳도 구경시켜 주고 싶은데,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때란 말이야.
오늘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고, 오늘이 사랑을 받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어.
그러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사랑 표현을 내일로 미루지 마. 내일은 상상 속에만 있는 거야.
아무도 내일을 살아 본 사람은 없어. 세월이 가도 매일 오늘만 사는 거야. 사랑도 오늘뿐이지 내일 할 수 있는 사랑은 없어 -.
다년 간 교도소 재소자들의 교화를 위해 활동해 오고 있는 양순자 교화위원이 쓴 글 <인생9단>에 나오는 말이다.
교도소는 징역형이나 금고형, 노역장 유치나 구류 처분을 받은 사람, 재판 중에 있는 사람 등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교정(矯正)이란 틀어지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단어다. 법률용어로는 교도소나 소년원 따위에서 재소자의 잘못된 품성이나 행동을 바로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바로잡아 갱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도행정이다. 이처럼 교정의 본래 의도는 범죄자들의 감화(感化)에 있다.
원래부터 악인은 없다는 설이 다수설인듯하다. 이에는 맹자, 존 로크가 있는 반면 이와 견해를 달리하는 설에는 순자, 마키아벨리 등이 있다. 널리 알려진 성악설과 성선설, 성백지설 등에 관한 이론의 상설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범죄학자 롬브로소는 어떤 사람들은 원시 단계의 인간이 가졌던 생물학적 특징을 물려받아 범죄자 또는 격세유전 범죄자로 태어난다는 데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범죄자에게는 일정한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복잡다기한 현대에서는 범죄도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서 사회적 책임론이 대두된다. 롬브로소에 따르면 범죄의 원인은 선천적·생래적 조건이기 때문에 범죄인들은 타고난 범죄성으로 인하여 어떤 교육을 받든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예방·교정이 불가능하므로 영구격리, 도태시켜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이 이론은 설득력을 잃어 오늘 날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지금 법무부 산하에 교정본부를 두어 수형자에게 교육, 교화활동 및 직업훈련 등을 실시하여 출소 후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 할 수 있도록 교정행정을 펴고 있다.
며칠 전 사망한 리비아의 통치자였던 카다피는 시민군에 쫓기다가 죽음을 앞두자 마지막에 “살려 달라!”는 처절한 외마디 절규가 있었다한다. 그 만큼 사람은 누구나가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이다.
생명은 그 만큼 소중한 것이다. 천부불가양의 인권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벌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부인권론을 내세워도 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정의라는 이름하에, 법의 집행이라는 이름하에 똑같은 인간에 의해 범죄인의 인권을 제한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회로부터 격리다.
우리는 법률상 사형폐지국가는 아니다. 사형조항이 있다하더라도 영원한 격리, 즉 사형의 집행만은 미루고 있다. 교정·교화를 거부하고 누범을 저지르는 누범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내일이 교정의 날이다. 인간이면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진정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인생 막장까지 가기 전에 잘못을 깨닫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바로 잡는다면 누구나 남은 인생을 보람되게 살 수 있을게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선행을 베풀 시간도 부족하다. 선을 행하진 못할망정 죄는 짓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소월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되지 않고,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로 살기위해서라도 죄는 짓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주위의 가족과 친지들을 생각해서라도, 모두에서의 글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부를 때 대답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필
2011년 10월 27일 (목)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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