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류창현(67회) 인천논단/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 3.29)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
/류창현 객원논설위원
식물들에게는 죽음의 계절로 상징되는 겨울은 어느 틈엔가 조용히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새 생명이 움트는 봄으로 변하고 있다. 봄이면 어김 없이 새잎을 돋아내는 풀과 나뭇잎들을 보면서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곤 한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는 봄이면 변함없이 되살아나는 자연을 보고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 있는 인간과 대비하면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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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죽었던 자연만물이 봄이라고 되살아나는 것일까?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삼라만상은 춘하추동의 자연법칙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 가까운 지인 두 분의 죽음을 보았다. 한 분은 생전에 국가와 사회와 2세 교육을 위해서 크고 높은 업적을 이루신 큰 인물이시다. 늘 흥국부민(興國富民)을 역설하셨고 성실함을 인생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시고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5남 2녀의 자녀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시어 당신 대에 명문가를 이룩하시고 백수를 얼마 안 남기신 3월 초하루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 많은 아흔 일곱의 생을 마감하셨다. 또 한 분은 오십대 후반의 주부로 어린 시절뿐아니라 결혼 후로도 살기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고 슬하에 2남과 가난한 남편만을 남겨두고 세상과 아픈 이별을 했다. 예순도 못 살고 곧 피어날 봄꽃도 보지 못한 채 서둘러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저 담담하게 生老病死라는 인생의 순환원리로만 받아들여지던 죽음이 새삼스러울 만큼 아픔의 농도와 크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동안 두 분과 주고받은 정의 양과 크기가 남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특별히 젊은 죽음을 접할 때는 더욱 슬프고 아프며 남아 있는 아이들과 가족의 삶이 안타깝다. 못내는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하게도 된다.
각각 서로 다른 삶을 마감한 가까운 두 분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아주 겸손해지고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됨은 무슨 까닭일까? 죽음을 의식한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나. 고전문학이나 옛 문인들의 글을 통해보면 죽음은 삶을 허무하고 무상하게 한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 몽’에서 주인공 성진은 온갖 부귀영화와 인생의 환락을 다 누렸으면서도 말년에는 결국 선조들의 무덤 즉 죽음앞에서 인생무상과 삶의 허무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죽음의 한계를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던 시황제는 서복이라는 신하로 하여금 많은 재물과 동남동녀 3천명을 딸려 동쪽에 있는 삼신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하였지만 그런 그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죽음앞에서 겸손해지는 우리 인간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잘 사는 것일까?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의 삶을 생각해보면 한 순간 한 순간의 삶이 한 없이 숙연해진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을 남김으로써 이승을 떠나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동양의 철인 공자는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여 삶의 가치를 道에 두었고, 서양의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함으로써 성실을 삶의 가치로 삼았다. 연전에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가르쳐 주시고 입적하신 법정스님은 살아 있는 매 순간 순간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삶이 참된 삶이라 하셨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이라 해도 절망하지 말고 가능한 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성실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려 함이 참된 삶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한 줌의 재가 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한 줌의 재가 되고 흙이 되면 그만인 것을 왜 많은 삶이 그리도 모진 고통이고 다툼이고 아픔일까?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나?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삶은 어떤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내 마음은 정화(淨化)되고 나는 삶과 죽음사이에 서서 철학자가 된 것만 같다.
2011년 03월 29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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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載峻님의 댓글
류 교장, 감사 하네 교장 게재 글 내용 중,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 이를 실천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네 재학 댱시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 병 즉 절망이란 진리를 체험하기도 했었네 류 교장의 글 빠짐없이 그리고 감사히 읽고 있네 건필 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