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곳 : 인천신문(11.)

나채훈의 중국산책
허세와 고집이 남긴 폐해
명대(明代)의 영종은 왕진이란 어리석은 자를 감싼 암군(暗君)이자 야전에 나가 적에게 생포된 유일한 황제였다는 불명예와 두 가지 원호를 사용한 오점을 남겼다. 그가 황제에 오른 무렵, 장성 북쪽막북 땅에서 오이라트가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조공이라는 형식으로 명과의 교역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고, 명은 이익을 주어 오랑캐를 회유하고 국경지대를 혼란케 하는 일을 막았기에 서로 불만이 없었다. 평화(平和)를 돈으로 사는 대가로서 조공의 규모는 적절하게 타협되어 사절단이 오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상을 수여하고 말(馬)의 수량과 가격도 조정되었다. 그런데 영종의 정통 13년에 오이라트 사절단은 2천5백 명이 와서 천 명을 늘려 보고했다. 당시 권력자인 왕진은 화를 내며 실제 인원에게만 은상을 내리고, 말(馬)의 값도 오이라트측이 제시한 액수의 5분의 1로 줄였다. 오이라트의 에센은 터무니없이 액수를 깎아 내리자 군사를 모아 요동으로부터 감숙에 이르는 국경에서 일제 공격을 감행했다. 에센은 스스로 정예를 이끌고 산서(山西)의 대동지역을 공격했고, 명군(明軍)은 속수무책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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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변(諸邊)의 수비 장수들,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고 사서에 나온다.
이런데도 왕진은 허세를 부리며 황제의 친정(親征)을 권했고, 병부상서(국방장관) 광야, 시랑(차관) 우겸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이 반대했으나 영종은 왕진의 뜻에 따랐다. 50만 대군이 동원되었고, 거용관(북경의 북서쪽 60킬로 지점의 장성)을 넘을 무렵 대신들은 황제가 이곳에 머물고 여기서부터는 야전부대에게 맡기자는 의견이었다. 왕진은 역시 듣지 않았다. 군사지식이 없는 만큼 더욱 고집스럽게 진군을 요구하여 에센의 공격지점인 대동(大同)까지 갔다. 오이라트는 명의 50만 대군에 겁을 먹었는지 그 흔적조차 없었다. 철군이 결정, 대동으로부터 동남으로 향하고 울주(하북성 울현蔚縣)를 거쳐 자형관(紫荊關)으로 해서 북경으로 가는 경로가 정해졌다. 울주는 왕진의 고향, 그는 고향에다 황제를 모셔놓고 자신의 위광을 한껏 자랑하리라는 기대를 했으나 동남으로 향하는 도중 생각을 바꾸게 된다. 50만 대군이 가는 곳마다 농작물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걸 목격한 것이다. 대군이 울주에 도착할 때면 본격적인 수확기가 되므로 피해는 뻔한 일. 왕진은 애향심(愛鄕心)을 발휘하여 급거 경로를 바꾸어 북쪽을 우회하기로 했다. 50만 대군이 먼길로 우회하자 군사들의 피로도 그렇고 기동성을 가진 유목민족 오이라트의 움직임도 염려가 되어, 병부상서 광야는 정예군으로 후방을 대비하며 황제 일행은 서둘러 자형관으로 직행하길 요청했다. 이에 대해 왕진은 ‘썩어빠진 서생 따위가 어찌 병사(兵事)를 알리오. 다시 그런 주장을 하면 목을 베겠다’고 호통을 쳤다.
결국 이 애향심에서 비롯한 우회 퇴각이 오이라트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에센은 기병을 동원하여 명군의 후미를 기습, 괴멸시켰다. 명군 본진은 도망치듯 토목(土木)이란 곳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도 왕진의 치중대 때문에 멈칫거리다 오이라트의 주력군에 포위당했다. 사상자 수십만, 더 이상의 참패는 없을 지경이었다. 원정을 주장한 왕진은 난전통에 죽고 영종은 포로가 되었다. 한편 북경을 지키던 우겸은 영종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즉위시켰다. 성왕 경태제다. 이상한 황위계승이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 황제가 적군에 포로가 된데다 오이라트군이 북경을 포위하고자 일제히 남하하고 있었기에 겁에 질린 대신들은 남경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했다. 우겸은 ‘천도를 주장하는 자는 죽여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며 오이라트에 맞서기 위해 신황제를 내세웠던 것이다. 영종의 친아들이 겨우 3세였으므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중 포로에서 풀려나 돌아온 영종은 복위하여 순천(順天)이라 개원했으며 자신의 뜻을 묻지않고 경태제를 세웠다는 이유로 우겸을 죽였다. 국가의 절대적 위기를 구한 공로자를 죽이고, 처벌대상인 왕진에게는 형상을 만들게 하여 공양까지 했다. 어리석은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설친 원정 사건이후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었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개헌 토론을 보면서 갑자기 영종과 왕진 생각이 난 것은 왜일까?
2011년 02월 11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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