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반대를 위한 반대'는 화(禍)를 부른다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 1.28)
나채훈의 중국산책
'반대를 위한 반대'는 화(禍)를 부른다
누르하치가 심양(瀋陽)에 도읍을 정하고 청(淸)제국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있을 무렵인 서기 1625년, 명(明)의 비밀경찰 동창(東廠)의 장관 위충현은 동림당(東林堂)이라는 정파에 관련된 인물들을 철저히 일소했다.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는데 당쟁따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쟁을 즐기는 사람들 눈에는 자파(自派)와 반대파(反對派)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동서고금의 예인 것 같다. 동림당은 당시 반(反)내시파였으니 내시두목격인 위충현의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진층(李進忠), 시정 무뢰배였다. 도박에서 돈을 모조리 잃자 홧김에 스스로 남성을 거세하고 내시가 되었다. 내시가 되면 돈벌이가 쉽게 될 것으로 여긴 행동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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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림당은 반(反)장거정 그룹이었다. 장거정이라고 하면 280년 명(明)의 역사에서 가장 유능한 재상이었다고 전해지는 인물. 물론 인간적으로 다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의 내일을 염려했기에 수완을 발휘하느라 좋지 못한 술책도 부리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던데서 별로 호감을 사지 못했으나 그의 시대에 최대사업인 ‘천하의 경작지 측량’만큼은 휘청거리던 명나라를 굳건히 한 업적이었다.
이는 제국의 모든 논밭을 실제로 측량하는 일. 당시 각 지역의 호족이나 대지주는 물론 조정대신들까지 예외없이 <숨겨놓은 땅>을 갖고 있었다. 등록되지 않았으므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고 재산을 숨기는 방법으로도 썩 괜찮았던 모양이다. 장거정은 이 시책을 내놓았을 때 조정대신, 내시 심지어는 황실까지도 숨긴 것을 토해내야 했으므로 격렬히 반대하고 심지어는 장거정에 대란 모략과 투서, 온갖 유언비어에 직면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허튼 소리를 하는 서원(書院)을 철폐하기도 했고, 행정개혁을 통해 경비를 대폭 절감하면서도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과를 올렸으며, 끝내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실측을 단행했다. 장거정은 생전에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만력8년(서기 1580)11월이었으며, 사망한 것은 만력10년 6월이었다. 대력 1년반 정도 사업을 추진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측량결과 전답의 총면적이 약 7백만 경(傾)으로 이는 등록된 전답 4백만 경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전답에서 40%이상이 세금을 내지 않는 숨겨진 땅이 밝혀지자 세금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만성적이었던 적자재정을 흑자재정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비축만도 10년치가 넘었다. 이후 명나라는 웬간한 흉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의 국가를 위한 이런 실적보다, 그가 사망하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원래 같으면 장기간 복상을 위해 직책을 떠나야 했는데도 국정을 중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무한 것까지 싸잡아 반대파들이 연이어 탄핵하고 나섰다.
결국 장거정은 사후 일체의 관직을 삭탈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가족들은 탄압받아 장남의 경우 자살했고, 동생은 먼 변경지대로 유배당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반대파들은 이런 복수를 했으나 이미 정파를 초월하여 나라를 이끌 인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 장거정에 필적할만한 인재가 있었는지 모른다. 허나 장거정의 업적과, 그의 사후에 받게 된 대접을 보면서 재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거정이 죽고나서 그의 위대성을 증명한 셈이겠으나 이후 명의 조정에는 정치부재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장거정을 반대하여 집안까지 도륙한 무리가 바로 동림당. 그들은 스스로 <청의파(淸義波)>라고 칭하며 마치 정의를 지키는 그룹처럼 무리를 지어 정치적 주장을 했다. 태자 옹립문제나 후비 책봉 등 사사건건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풍토가 결국 무뢰한 출신으로 도박이나 즐기던 자로 하여금 궁궐에 들어가 실권을 쥐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몰락했으나 그들은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셈이다.
당쟁을 일삼는 시대에나 그렇잖은 시대에나 하잘 것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정치문제로 비화되고 공멸하는 까닭은 무분별한 당쟁의 소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01월 28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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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억님의 댓글
무릇 사람을 쓸때는 목재를 쓰는것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땔감으로나 쓸 목재를 고급장식장으로 사용한다면 아무리 좋은색을 입힌다해도 쓸모없듯이 사람은 그 크기에 따라 사용 쓰여져야 한다 생각합니다...지금의 나는 어느 용도에 쓰여지는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생각하고 더 좋은곳에 쓰여지기 위해 수양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