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특별기고]/다시 품어보는 우리 반쪽의 미술세계(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20. 1. 8)
[특별기고]다시 품어보는 우리 반쪽의 미술세계
경인일보 '북한 황영준展'에 부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오랫동안 北예술 한국선 '금기'
2005년 송암선생 유화전 '성과'
분단후 언론사 첫 초대전 의의
다양한 연구·교류 활성화 기대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나라가 갈리고 70여년이 흘렀다. 그래도 우리 힘으로 상주 인원 오만여명의 북한 근로자가 10여년간 일터를 잡은 개성공단도 세우고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관광했다.
그뿐인가.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서 제한적이지만 평양, 남포, 개성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승려의 몸으로 목탁 대신 창을 들도록 선도한 서산대사 청허 휴정(西山大師 淸虛 休靜, 1520~1604)이 주석한 묘향산도 갈 수 있었다.
또 우리나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그리고 박근혜(국회의원 재직시) 대통령도 스스로 38선을 넘어 북한 주민에게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남북한 문화사업은 이룩된 것이 노력에 비해 많지 않다.
특히 회화, 조각, 서예에 대해서 남북이 절벽처럼 전시, 연구 성과가 거의 없었다. 1987년 계간 미술 겨울호(통권 44호)에 '해방 공간의 한국 미술' 특집으로 북으로 간 미술가들을 다루었고, 2004년 밀알미술관에서 발행한 '한국 미술의 잃어버린 페이지', 2005년 월간 미술 6월호에서 '분단미술사, 잃어버린 페이지'라는 특집을 내놓았다.
2018년 문범강의 '평양미술-조선화 너는 누구냐' 정도가 북한예술을 우리 앞에 당겨 가까이 보게 했다.
오랫동안 북한 미술은 우리 사회의 금기였다. 이들의 작품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단과 6·25를 전후해 월북하거나 납북된 문인이나 예술인들에 대하여 월북 이전 작품들을 해금(解禁)시킨 정부 정책 덕분에 가능했다.
필자가 과문하고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빈약한 때문에 그 사이 남모르게 남북한 예술 교류에 공이 큰 분들을 이 자리에 미처 다 밝히지 못하는 것을 사과드린다.
그 사이 우리 인천의 소중한 성과가 지난 2005년 송암 이회림(松巖 李會林, 1917~2007) 선생이 자비로 북한유화전(北韓油畵展)에 전시한 회화 500여점이 돋보인다.
선생은 "송암미술관은 개관기념전으로 우리 유화도입기(油畵導入期)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일본유학생과 납북·월북 작가 및 그들에게 교육받은 대표적 북한미술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민족미술 발전을 위한 학습장을 제공하고 나아가 민족 동질성 회복과 통일조국의 실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염원을 밝혔다.
오랜 세월 개인과 작은 단체들이 엄청난 노력과 경제적 손실을 감당하고 얻은 성과였지만, 그 사이 주변의 몰이해와 사회와 정부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던 차에 신년 초 북한의 대표적인 예술인 중 한 명인 화봉 황영준(華峯 黃榮俊, 1919~2002) 화백의 작품 200여 점이 경인일보 주최로 인천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는 쾌거를 듣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화봉은 인천 출신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화백이 1936년에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서 만든 후소회(後素會)의 회원이며 그 문하에서 5년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인천과의 인연이 깊다고 하겠다. 당시의 작품으로는 '하늘 소 탄 농민', '농촌풍경', '금강산풍경' 등이 있다.
분단 이후 신문사가 북한 미술 작품을 초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더욱이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을 동시에 수백 점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앞으로 북한미술연구에 길이 보인다고 하겠다. 이를 시작으로 조각, 서예분야로 범위를 넓혀 보다 폭넓게 북한예술과 접촉하고 체계적인 연구와 교류의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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