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줄탁동시(啐啄同時)’와 노잔유기(老殘遊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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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0. 1.10)
‘줄탁동시(啐啄同時)’와 노잔유기(老殘遊記)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역사소설가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2020년은 새로운 십 년대가 시작되는 해이자 백 년 단위로 헤아리면 ‘대한민국 시즌2’가 출발하는 해다. 그만큼 새 출발에 거는 기대와 의미가 남다르고 생각해볼 바가 많다.
지난해 내내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안 등이 해가 바뀌기 전에 국회를 통과했다. 두 법안 모두 지난 20∼30년을 넘긴 해묵은 과제였으나 번번이 기득권의 탐욕 앞에서 좌절되거나 왜곡되곤 했었다. 따라서 누군가에겐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식되겠으나 적어도 우리 사회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강행 처리한 개정 선거법이 당초의 구상보다 훨씬 후퇴했고, 실망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20대 국회의 한심무쌍한 몰골을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하고, 공수처법이 옥상옥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겠으나 군사정권 종식 이후 살아 있는 권력에 초반은 엎드리고 후반은 달려들기를 반복하면서 터득한 묘수로 막강한 권력으로 변질된 정치검찰의 폐해를 떠올리면 일단 새 제도를 운영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이나 미흡함을 사회적 논의를 거쳐 개선하는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낡디 낡은 그 세력들의 완고한 성채를 허물 수 있는 전략적 고지를 일단은 확보했다는 기대는 분명하니 말이다.
물론 앞으로 3개월 이후에 있을 21대 총선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겠으나 정치 지형이 20대 국회보다 훨씬 더 나아질 가능성은 충분히 높아졌다.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 아등바등하는 행태에 대해 가차 없는 심판이 뒤따를 터.
그렇다고 선거 이후 새로운 난제도 무수히 등장할 텐데 자신의 신념에 더 겸손하고 상대의 신념에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는 건 소망이라 해두자. 공수처법은 검찰 내부의 유능하고 양심적 인력을 살리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알려진 임은정, 서지현, 안미현 검사 같은 인물들과 MB 시절 터졌던 ‘벤츠 여검사’ 사건을 비교해 보면 가늠자로서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런 기대와 가능성이 내부의 자발적 양보나 기득권 포기 없이 이뤄지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개혁 대상인 동시에 개혁 주체이기도 한 모순적인 집단이 대학교수, 법조인, 고위공직자, 기성 정당과 실력자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 등등 전문적이고 힘이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청렴하며, 능력 있고, 양심적인 인물들이 지금도 짓눌려 있는데 선거가 끝나고 공수처가 신설된 이후에도 여전히 짓눌리게 된다면 새로운 십 년, 새로운 백 년의 의미가 공염불 아닌가.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
검찰 개혁의 지휘봉을 쥔 추미애 신임 법무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밖에서 알을 깨려고 하는 사람은 국민이고 안에서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려는 사람은 검찰 조직이 아니라 개개 검사들"이라며 "(검사) 한 분 한 분 진심으로 개혁의 동반자로 삼겠다"고 했다. 어디 검찰뿐이랴. 앞서 지적한 그 전문적이고 힘 있는 집단 모두 내부에서의 혁명적 변화가 절실하다는 걸 재삼 인식해야 할 일이다.
「노잔유기」는 청말의 지식인 유악이 쓴 소설로 노잔이라는 의사가 전국 각지를 돌며 목격한 관리들의 무능과 탐학을 고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얘기가 그 가운데 있다.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는 마을에 수해가 겹쳐 수많은 사람이 죽고,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은 도적떼로 변한다. 조정에서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능력 있고 청렴하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을 함부로 처형했다. 노잔은 일갈한다. "탐관오리는 자신의 약점을 알기에 공공연히 내놓고 나쁜 짓을 못하는데 청렴한 관리는 자신이 깨끗한 만큼 무슨 짓이든 못할 게 없다고 여겨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내 눈으로 본 것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공무원이 우수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해도 잘못된 신념을 가지면 부패한 관리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는 유독 관료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려니와 옛 경우만도 아니다. 오늘의 사회 각 집단에서 고루 씹어 볼 대목이다.
기호일보, KIHOILBO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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