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도덕에 기초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0. 9.30)
원현린 칼럼 /
도덕에 기초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국무총리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던 모 장관은 한 연수원 세미나에서 자신이 총리후보군으로 거론되는 것과 관련, “총리후보가 되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한다.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적어도 우리 사회엔 없을게다. 하지만 말의 진실과 거짓을 떠나 고위공지자 중에 이러한 말이라도 나왔다는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 어떻게 총리가 되는 것이 불행한 일인가. 국무총리 자리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불리는 재상(宰相)자리고 영상(領相)자리다.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청문회 과정을 통해서 나신(裸身)이 되는 데도 끝까지 명예와 권력을 탐하다가 종국에는 망신만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도중하차하는 예를 흔히 보아왔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김태호 국무총리후보가 낙마한데이어 어제부터 김황식 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천거되는 후보마다 후보의 하자 전력이 벗기면 벗길수록 드러나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하나같이 ‘양파총리’라든가 ‘총리감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등 시민들은 고위층의 부도덕성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다.
청문회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청문회라는 관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면 애당초 나아가지 않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보질 못했다. 국가가 총리나 장관자리를 놓고 부르면 그 누구도 마다하는 사례는 없었다. 심지어 대학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석학(碩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달려가곤 했다. 그 옛날 출사(出仕)를 사양했다는 중국 허유(許由)의 이야기는 단지 전설로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관료들은 하나같이 ‘정의사회 구현’을 조정에 나아간 출사의 변으로 내세우며 강조한다. 옛 부터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혹자는 ‘법이 정의’라하고 또 다른 이는 ‘국가의 이익’이라하는가 하면 ‘강자의 이익’이라고까지 무리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정의’야말로 ‘법적 안정성’, ‘합목적성’과 함께 법의 이념이다. 그동안 부정의와 불공정에 익숙해있던 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정의’와 ‘공정’이란 잣대로 매사를 측정하고 평가하려하고 있다.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이다. 필자는 언젠가 본란에서 ‘누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겠는가’라는 제하에서 “정의가 무엇인가, 절대적 정의, 인간의 아름다운 꿈이 무엇인가를 아직 모르고 있으며 또한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정의는 자유라고 하는 정의, 평화라고 하는 정의, 민주주의 즉 관용이라고 하는 정의”라고 결론지은 켈젠의 ‘정의론’을 인용한 적이 있다.
부패하거나 무능력한 인사가 막중한 공직에 오르면 그로인한 폐해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좀 늦더라도 철저히 검증된 인물을 총리자리에 앉혀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군자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이다. 국회도 웬만해야 통과시키지 드러난 의혹들이 사실일 경우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을게다.
총리후보 청문회와 관련, 논객들도 주장이 나뉘고 있다. 혹자는 털끝만큼도 하자가 있어선 안 된다하고, 또 다른 혹자는 질곡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남긴 흠은 웬만하면 덮고 가자는 논리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다. 대통령제하에서의 총리는 내각제에서의 수상과는 다르다. 총리 공백으로 일정부분 국정차질은 있겠으나 감내해야 한다. 부 적격자를 임명하여 ‘정의’와 ‘공정’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미국의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놓고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2010년 09월 30일 (목)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