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우리 시대의 ‘역사’가 된 인천상륙작전(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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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Good Morning INCHEON 9월호
우리 시대의 ‘역사’가 된 인천상륙작전
/글 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6ㆍ25’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국토의 어디선가는 아직도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판문점에서는 협정 조인의 당사자들이 팽팽한 긴장 속에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전쟁을 여전히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국’을 ‘해방’하려 했다는 시대착오적인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것이 ‘해방전쟁’이 아니었음을 극명하게 증언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 안에서는 정부의 공식어로서 국어사전과 교과서에 등재되어 있는 ‘6ㆍ25전쟁’이란 용어를 버리고 줄곧 ‘한국전쟁’이라 달리 지칭하는 세력들이 있다. 국민이라면 두루 사용해야 할 표준어 사용을 자의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들에게는 왜 ‘한국전쟁’이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의외로 단순한 것처럼 보이나 의미론적 해석은 매우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제적 성격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 ‘Korean War’를 번역해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궁색하다. 그것은 제 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보려는 시각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 나라, 제 땅에서, 제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어간 전쟁을 굳이 외국인의 시각에서 나온 용어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크게 어긋난다.
‘한국전쟁’을 의미론적으로 굳이 해석해 보았자 (1)한국이 일으킨 전쟁(그러나 전쟁 발발의 책임은 북한에 있다.) 아니면 (2)한국에서 일어난 전쟁(그러나 북한 지역에서도 전쟁을 했다.)이라는 뜻이니,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용어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 용어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인천과 노르망디는 바닷물 빛깔 달라
인천상륙작전이 극한의 위기에 처한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위기로부터 구해낸 구국의 작전이었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벌였던 연합군의 북유럽 상륙작전은 나치 독일에 신음하고 있던 유럽인들을 구출해 낸 세기의 대작전이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은 특히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가진 나치의 폭력에 대항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대항해 승리함으로써 600만명의 유태인 학살 등 최악의 전쟁 범죄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세계는 인류 양심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전승적 축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6ㆍ25전쟁 중 최대의 작전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은 또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고, 남북 간에 자행된 참혹한 살육을 단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켜 잠정적이나마 평화라도 되찾게 했다는 점에서는 노르망디상륙작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전쟁의 발단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강점에서부터 배태되었고, 숙명적으로 미주 등지에 망명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자연스레 민주주의자로서의 미래를 꿈꾸며 귀국한 반면, 중국, 만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했던 이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내일을 세우고자 갈등했던 것이 또한 전쟁의 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에 분단구조를 만들어 낸 1차적 요인은 물론 국제정치에 있었고, 그것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국제형 분단이었던 것이지만 북한은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잘 준비된 전면 남침을 해 한반도를 민주ㆍ공산 양대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우리시대에 축제로서만 받아들이기에는 그 같은 배경과 민족적 피해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역사로서 인식해야
그럼에도 인천상륙작전이 6ㆍ25전쟁 중 결정적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대목이었음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작전은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의 지시에 의해 구상되었으나 조수와 지형 등 제반 조건이 여의치 않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점령할 경우 북한군에 주는 심리적 영향은 물론 길어진 보급로의 허리를 끊어 적을 괴멸시킨다는 목표가 분명한 전략이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낙동강 전선에서 끝없는 죽음에 직면한 수많은 국군의 목숨을 살릴 길은 인천상륙작전뿐이라는 판단 아래 마침내 9월 12일, 2백 61척의 대수송선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9월 15일, 이윽코 작전이 개시되었다. 인천 앞바다를 새까맣게 메운 전함들이 일제히 쏟아낸 포탄으로 북한군이 거점으로 사용하던 시내의 건물들과 군사시설은 일순간 화염에 휩싸였고, 월미도 주둔 북한군 역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날 오후 국군과 연합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국군과 연합군은 월미도를 장악한 데 이어 인천 시가지에 돌입했다. 인천측후소가 있는 북성동 고지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몇날 몇일 동안 벌어졌고, 그 와중에 중앙동 소재 인천경찰서 유치장에서 학살사건 등이 벌어졌는데 그 피해자는 모두 인천 시민들이었다.
구체적 자료가 없어 정확한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송림동 동인천경찰서에서도 6ㆍ25전쟁 중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야말로 ‘지옥’과 다름없는 시간 속에서 전쟁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어가는 참혹한 살상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 무렵 북한군은 최후의 보루로 2개 사단 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해 대항했으나 우리 해병대는 주안, 부평, 김포, 여의도를 거쳐 9월 28일 마침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서울을 수복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정부는 수도 탈환식을 거행함으로써 훗날에 있을 휴전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60년. 한편에서는 그 ‘내재적 비극’을 축제화 하자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역사가 된 인천상륙작전을 폄하하며 그 주인공인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기어이 끌어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두가 아직 역사를 역사로 인식하지 못한 소이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 6ㆍ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우리 사회에서 종식시키기 위한 첫 단추는 말할 것도 없이 그에 대한 엄정한 역사적 사실의 연구이며, 그를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 고장에서 벌어진, 우리의 전쟁을 더는 남의 나라 전쟁 말하듯 해서는 안 되겠다. 전쟁 한 세기가 되기 전에 각종 사료의 발굴, 증언의 채록, 엄정한 기술 등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 나가야 한다. 그와 함께 그를 공유하면서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만이 60년 이래의 비극을 극복하고, 승화(昇華)시키는 유일한 길이라 굳게 믿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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