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오광철(53회)의 전망차/중화루 가던 길(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0. 7.12)
오광철의 전망차 /
중화루 가던 길
아마도 1940년대초였으리라.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전망차자는 금곡동 샛골에서 중화루가 있던 중앙동까지 혼자서 걸어다녔었다. 아버지의 근무처 K운수사가 중화루 바로 옆집이었다. 지금은 그곳이 세탁소가 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항만하역업이라고 할 2층구조의 운수회사에 들어서면 몇개층의 창고가 있고 가파른 돌층계로 내려가면 유모사장의 살림집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또다른 작은 도로가 있고 중화루의 뒷문도 그리로 통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곱 여덟살 짜리를 거리에 내놓지 않겠지만 그시절 전망차자는 곧잘 그 먼길을 가고 왔었다. 일본인의 ‘노다쇼유’ 간장공장(지금의 동부경찰서)을 지나 배다리와 싸리재 그리고 긴담모퉁이로 해서 신흥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내려가면 ‘표관’극장(지금의 외환은행)이 있었다. 거기서부터가 일본인 거리-본정통이었으며 중국인 거리로 걸어 올라가면 중화루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검은 숯을 말리듯 해삼을 널어놓았었다.
마침내 운수회사 사무실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중화루에 데려가 우동을 사주셨다. 지금은 어린것들이 짜장면이나 탕수육을 좋아하지만 우동이 맛있었다. 중화루의 우동맛 때문에 자주 먼길을 가고왔었던듯 하다. 그리고는 할일없이 근방을 거닐었다. 자유공원에서 내려오는 길가의 기호일보 자리 건너편에 기와집 담배가게가 있었고 안마당에 깊은 우물이 있었다. 아마 유일한 한국인집이었을 것이다. 유사장 부친댁이었다.
중화루는 인천의 개항기 서양식 호텔이 훗날 변신한 중국요리점이었다. 대불호텔(일본어 발음으로 다이부쓰)이었다. 경인선 개통으로 불황 끝에 1918년 중화루라는 이름의 요리점이 되었다. 그곳에서 일제의 강점기와 그들이 부르던 지나사변이 2차대전으로 불거지고 그리고 인천상륙작전등 파란을 겪었다. 60년대초만 해도 그런대로 영업중이더니 재산권 싸움에 휘말리고 중국인 난민수용소가 되기도 하더니 1978년 철거라는 종지부를 찍고 오늘까지 빈터로 있다.
근대사의 교육장으로 활용방안이 모색되고 있다고 한다. 규명되어야 할 사안도 아직 많다.
2010년 07월 12일 (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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