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충혼탑(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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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0. 6. 9)
충혼탑
/( 584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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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한 지 아흐레 만인 1950년 7월4일 새벽, 북한군 제6사단이 인천을 점령했다.
이 날 북한군은 신흥동 해광사(海光寺)에 인천정치보위부를 설치하고 피난 못간 '반동분자'를 색출해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해 8월28일. 신흥동 1가에 살고 있던 백윤만(21세)은 "의용군에 자원입대하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문학내무지소에 일단 수감되었다가 해광사에서 심문받고 인천경찰서로 이송돼 감방생활을 했다.
그로부터 17일 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날 저녁. 백윤만은 내무서원들이 감방을 향해 무차별로 쏘아댄 총탄 속에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수감자 102명 중 53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반면에 인천의 2천여 학생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며 그해 12월18일, 폭설 속에 축현국민학교에 모여 '학도의용대'를 자원, 부산까지 행진해 가 참전했다.
그들 중 208명은 끝내 부모형제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휴전협정 조인 한 달여 전인 1953년 6월9일, 자유공원에 '충혼탑'이 세워졌고, 11월15일 인천출신 전몰장병 505위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충혼탑 앞에서 거행됐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비면에 새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충혼탑'마저 '자연보호헌장'으로 바뀌어 사라지고 말았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런 중에 '인천학도의용대'의 장거를 추념하는 비를 세운 분들과 사비를 들여 수년째 '인천학생6·25참전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경종·이규원 부자 같은 분들이 계시니 느껍다. 다 잊을 수 없는 헌신이요, 역사다.
/객원논설위원
2010년 06월 08일 (화) 2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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