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누가 이 땅에 정의(正義)를 세우겠는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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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0. 1.28)
/원현린 칼럼
누가 이 땅에 정의(正義)를 세우겠는가
인천국제공항에서 현직 경찰관이 금괴밀반출을 도와주려다 세관 당국에 적발돼 구속됐다. 그 양도 엄청나다. 국가유공 공무원 중 1천 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감사원의 감사결과 가짜 유공자로 판명이 났다. 교육청의 한 장학사가 장학사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 해주겠다며 교사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아 교직 장사를 했다. 입법기관인 국회는 여전히 당리당략에만 골몰, 민생을 외면한 채 정쟁만을 일삼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것이 요사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보도 내용들이다. 이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내세우고 있다. 우리의 각종 선언과 헌장 곳곳에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문구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한 예로 공무원윤리헌장에는 ‘우리는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로 시작하여 ‘우리는 불의를 물리치고 언제나 바른 길 만을 걸음으로써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국민의 귀감이 된다.’라는 등의 내용이 있다. 시민들은 공무원들이 이 헌장을 생활신조로 삼고 일하고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우리의 이상은 말 할 것도 없이 정의사회의 구현에 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데 선봉에 서야할 집단이 이렇듯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으니 누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겠는가.
우리는 법의 이념으로 정의, 법적 안정성, 합목적성을 들고 있다. 이렇듯 정의는 법의 이념이기도 하다. 사법기관마다 곳곳에 정의의 상징물을 세워 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의의 여신’으로 불리는 디케의 상이다. 이 여신은 두 눈을 안대로 가린 채 한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법관은 재판을 함에 있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정의에 입각하여 공평무사하게 판결하라는 의미다. 흔히 법조삼륜이라 불리는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정의를 이 땅에 세우겠다며 직분을 내세우고 있는 대표적인 직업군들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법원의 판결을 놓고 법관의 자격이 논란이 되고 있다. 만약 검찰이 정의를 세운다며 형사피고인을 법정에 세운 사건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면 기소가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우 대개는 무리한 기소이기 때문이다. 법원으로부터의 무죄판결은 검찰이 무고한 시민에게 상해를 입힌 것과 다르지 않다. 역으로 법관이 오판을 하여 무고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면 그 법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우 모두가 사법정의의 실현에 어긋나는 예들이라 할 수 있다.
고래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많다. 예부터 최근까지 숱한 철학자들이 정의에 대하여 정의를 내려왔다. 플라톤은 정의를 국가의 이익이라 했다.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의 이익이라 했다. 또 다른 혹자는 법이 정의라 했다.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잘 알려진 루돌프 폰 예링은 정의를 권리로 보았다.
법학자 한스 켈젠은 “정의가 무엇인가, 절대적 정의, 인간의 아름다운 꿈이 무엇인가를 아직 모르고 있으며 또한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정의는 자유라고 하는 정의, 평화라고 하는 정의, 민주주의 즉 관용이라고 하는 정의”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이상인 정의의 의미는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아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정의에 대한 정의를 명쾌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의를 세운다.’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과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의를 이 땅에 세운다느니 하고 운운하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우리에게 과연 법을 통한 정의를 구현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있는가.
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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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1-27 18: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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