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정치가 해서는 안 될 ‘역사의 평가’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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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9. 6.28)
정치가 해서는 안 될 ‘역사의 평가’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소장/역사소설가
▲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소장
‘김원봉 떠받들기’와 ‘백선엽 찬가’로 이념 논쟁이 한창이다. 지난 현충일에 문 대통령이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고 결과적으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고 언급한 이후 벌어진 일이다.
차명진 자유한국당 전 의원은 김원봉의 월북 이후 정치적 행적을 거론하면서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했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일제의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백 장군님이 우리 군을 지켰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명백한 데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군의 뿌리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투사 김원봉과 한국전쟁의 영웅인 백선엽에 대한 이런 평가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 상실을 고통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가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문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 나눠 볼 수밖에 없는 우리 역사의 현실적 잣대가 표류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삶에는 잣대가 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 남의 잣대가 나와 다르면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있어야 하고, 내 잣대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성찰적 회의도 중요하다. 서로의 잣대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잣대를 찾으려는 지난한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특히 역사에서 그렇다. 우리처럼 상실한 역사의 존엄성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바람과 강」이라는 김원일의 장편소설에 나오는 ‘이인태’는 이런 점에서 되새겨볼 만하다. 그는 18세 때 북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겨야 할 사실들을 실토했다. 그 대가로 풀려나 중국·러시아·일본을 떠돌았고, 해방이 되자 귀국해 고향 근처 마을의 주막 과부에 의탁해서 8년의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겨울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는 기행을 벌인다.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려 하지만 죽는 날까지 돼지우리에서 살겠다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는 일본군에게서 풀려날 때 일본군 장교로부터 "우리도 너를 인간 이하로 대하며 족쳤지만 그건 황실과 조국을 위한 애국의 일념이었다. 우리는 천황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동족을 팔아먹은 개만도 못한 자식이다. 개돼지와 같기에 죽일 필요조차 없는 쓰레기다. 우리는 천황폐하의 자비심으로 너를 석방시키기로 했다. 조선인은 이제 석방된 너를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민족을 팔아먹은 너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 마적이 될 수도 없다. 앞으로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개돼지같이 살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의 자백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조선인 아낙으로부터도 "평생 똥이나 처먹는 개돼지로 살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돼지우리로 들어간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인태의 생애는 허구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비극을 관통하고 있다. 소설을 쓴 김원일은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해방 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과거의 행적을 감추는 데 급급한 그 많은 사이비 애국자의 작태를 보면서 변절자의 반성적 삶을 써보고 싶었다"고 했었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이데올로기에 갇힌 수인처럼 살아오면서 역사의 존엄성을 상실해버렸다. 김원봉의 삶, 백선엽의 삶, 이인태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만큼 잃어버렸는지 나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유발된 이 독립운동가이자 북한 정권의 요직을 지낸 김원봉,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가 해방 이후 국군에 가담해 한국전쟁 영웅이 된 백선엽, 허구이지만 변절자의 삶을 뒤늦게 반성하는 이인태를 두고 저마다 역사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칭송하고, 매도하고, 질타하는 일은 이제 그만뒀으면 싶다. 누구나 해도 되지만 아무나 해서도 안 되는 것이 역사의 존엄성에 대한 평가다.
2019년 06월 28일 금요일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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