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영웅과 반영웅보다 바보가 더 나을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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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9.) 9.19
영웅과 반영웅보다 바보가 더 나을까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역사소설가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영웅담은 대부분 이상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이고, 동서양 공히 흥미진진한 작품이 소재가 된다. 그 영웅들은 공동체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세상을 구원한다. 도덕과 용기, 뛰어난 능력으로 무장하고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나관중이 쓰고 여러 차례 보완된 「삼국지연의」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들 영웅들의 활약상으로 가득 차 있는 건 하등 이상할 바 없다. 두 작품 모두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주는 쪽에 무게 중심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두 작품에서 반(反)영웅이 등장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일리아스」의 테르시스는 혐오감을 주는 외형에다 품성이 좋지 않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해서 총사령관 아가멤논을 욕심쟁이, 용사의 전령이랄 수 있는 아킬레우스를 겁쟁이라고 욕한다.
심지어 아마존족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의 죽음을 두고 비통해 하는 아킬레우스에게 시체를 사랑한다고 조롱한다. 남들이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말을 함부로 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삼국지연의」의 예형은 조조 진영의 책사와 장군 등을 여지없이 깔아뭉갠다.
"순욱은 초상난 집이나 앓은 사람 집에 심부름이나 갈 정도고, 순유는 무덤이나 지킬 수준, 정욱은 문지기 노릇이나 할 만하고, 곽가는 축사나 대독할 위인, 장요는 전장에서 북이나 징을 치면 알맞겠고, 허저는 목장에서 말이나 소를 기르기에 알맞고, 악진은 문서나 조서를 맡아서 읽으면 제격, 이전은 급한 서신이나 격문을 보내는 데 쓸 정도, 여건은 칼을 갈거나 만드는 대장장이가 좋겠으며 만총은 술 찌꺼기나 먹여두는 게 좋고, 우금은 판장이나 져 나르며 담이나 쌓는 미장이가 좋을 테고, 서황은 돼지나 잡아서 개백정 노릇하면 딱 알맞고, 하후돈은 독불장군, 조인은 돈이나 긁어모으는 데 이골이 난 원님, 그 나머지는 그저 옷이나 걸어둘 횃대 줄이거나 아니면 밥통이거나, 아니면 술통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기 보따리들이오."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으로 떠들어 댄다. 예형 역시 형주의 황조에게 험한 말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자 비웃었다. "어리석은 선비가 제 혓바닥으로 제 몸을 찔러 죽은 셈이다."
반영웅들이라고 해서 이상주의와 명예심, 용기가 없는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때에 따라 도적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며 개인의 사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서 전통적인 윤리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예를 들면 영화 ‘택시 드라이버’는 베트남전쟁의 퇴역장군이 택시 운전을 하며 뉴욕의 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쓰레기’로 생각하며 무기력과 망상에 빠져 살다가 거리의 소녀 하나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그는 포주를 죽이면서 예상치 못하게 영웅으로 떠오른다. 실상 그는 살인자에 가까운데 말이다.
얼마 전에 열린 제76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조커’가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코미디언으로 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멸시로 좌절한 주인공이 외톨이에서 악당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담은 반영웅물이다. 역사의 수많은 영웅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들려주는 응원가는 꿈을 가져라, 희망을 잃지 마라, 하면 된다,
이루지 못할 건 없다 등등의 긍정적 격려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꿈속이 아닌 현실은 절망이 가득 차 있고, 노력해봤자 오르지 못할 경계선은 너무나 확실하며 가득 찬 모순은 해결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베니스가 ‘조커’를 수상작으로 꼽은 이유가 바로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과 반영웅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무수히 생산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영웅이 공동체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세상을 구원할 뜻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과 이상주의와 도덕, 용기 등과 거리도 한참 멀어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반영웅 노릇을 하는 무수한 가짜뉴스의 내용도 혐오감을 줄 뿐 되새겨 볼 가치가 없다.
이제 영웅담이나 반영웅들과 결별하고 ‘바보가 되는 시대’가 기회일지 모른다. 원활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위해 권한과 재량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했다는 그 잘난(?) 태도가 국정이나 기업이나 심지어 작은 단체에서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게 증명된 오늘에서는.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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