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석남 선생(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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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11.30)
석남 선생
/조우성의 미추홀
20여 년 전, 필자는 새얼문화재단에서 창간한 계간지 '황해문화'에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때 마련한 특집 코너가 '원로를 찾아서'였는데 통권 제3호 때의 주인공이 석남 이경성(石南 李慶成) 선생이셨다.
인터뷰를 하러 인사동의 미술재단으로 가 뵈었더니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반겨 주셨다.
대뜸 아호를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부터 말씀해 주시라니까 '그게 이렇게 된 거예요' 하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어느 날, 동정(東庭) 선생 댁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셨는데, 솜씨가 뛰어난 웬 골동 현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우연케도 명문이 선생네 선산이 있는 동네와 같아 검여(劍如) 선생 등과 합의(?)해 정했다는 말씀이셨다.
그 후 선생은 평생 서구 관내의 동명(洞名)을 아호로 스스럼없이 사용하셨다.
또 어느 자리에서나 당신이 '인천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밝혀온 '인천인'으로서 한국 미술계의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큰 어른이셨다.
인천에 국한해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도자사(陶磁史)를 새롭게 쓰게 한 경서동의 녹청자 도요지 발굴, 국내 최초의 '시립(市立)'인 인천시립박물관의 건립, 인천시립예술관장, 인천시립도서관장 등으로 헌신해 오셨다.
특히 6·25전쟁 때 문화재급 유물들을 지켜낸 과정은 선생의 향토애가 남달랐음을 엿보게 하는 에피소드의 하나다.
지난날의 그 같은 공로를 기려 연전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발의로 인천시가 선생을 인천시립박물관 명예관장으로 모셨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부음이 날아들었다. 1919년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나셨으니 재세 91년이시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객원논설위원
종이신문정보 : 20091130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11-29 오후 8: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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