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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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 8. 7)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현대史의 주무대 '상해'
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는 여정(旅程) 2 권력자 된 북방인, 선각자 된 남방인
淸말기 장강유역 사람들의 중심도시로 발돋움
혁명·사상·서구적 민주주의·자유의 꽃 피어나
중국역사를 뒤돌아보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길고 긴 왕조의 물줄기는 황하를 중심으로 장강 이북에서만 전횡했다. 북부의 중국인들이 본질적으로 정복의 기질이 강한데 반하여 남부의 중국인은 주로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남부의 중국 사람들은 제왕의 자리인 용상에 오를 수 없었지만 밀가루를 주로 먹는 북방인들은 계속해서 권좌에 올랐다.
▲장강 이북의 왕조들과 장강 이남의 혁명가들
주(周), 진(秦), 한(漢),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왕조가 모두 장강 이북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왕조가 무너지고 나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개혁과 혁명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상하게도 장강 유역과 그 이남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아편전쟁의 영웅, 임칙서(林則徐, 1785-1850)는 복건성 출신이었고, 태평천국을 주도했던 홍수전(洪秀全, 1813-1864)은 광동성, 무술정변(1898)을 주창했던 강유위(康有爲, 1858-1898)와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광동성,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호남성, 신해혁명을 이끈 손문(孫文, 1866-1925)은 광동성, 그 동지였던 황흥(黃興, 1874-1916)과 송교인(宋敎仁, 1882-1913)은 호남성 출신이었다.
손문 이후 중국 국민당을 이끈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은 절강성, 군인이며 정치가인 이종인(李宗仁, 1890-1969)은 광서성,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고 지도한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은 호남성, 그 동지였던 주은래(周恩來, 1896-1976)는 강소성, 주덕(朱德, 1886-1976)은 사천성, 공산당 초기의 지도자 진독수(陣獨秀, 1879-1942)는 안휘성, 동필무(董必武, 1886-1975)는 호북성, 등소평(登小平, 1902-1997)은 사천성, 유소기(劉少奇, 1898-1969)는 호남성 출신이다.
이외에도 학자와 사상가, 문인 중에는 호적(胡適, 1891-1962)은 안휘성, 노신(魯迅, 1881-1930)은 절강성, 곽말약(郭末若, 1892-1978)은 사천성,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은 복건성, 현재 생존해있는 정치인 중에는 강택민(江澤民, 1926-) 전 주석은 강소성, 교석(喬石, 1924-) 전 중앙정치국 상무원은 절강성, 이붕(李鵬, 1928-) 전 총리는 사천성, 현 중국공산당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 1942-)는 강소성 사람이다.
▲혁명과 개혁의 산실
이처럼 혁명 및 개혁세력 중에 장강이남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나로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장강 유역 사람들은 1840년을 전후한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들이 태평양 연안 지역을 거점으로 물밀듯이 침탈해 들어왔을 때 그들이 함께 가지고 온 자본주의의 파도와 무력 앞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장강이남 사람들은 천부적인 이재성과 민족의 어려움을 체험하면서 얻은 자각이 이들로 하여금 선각자로 나서게 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말기, 북경이 행정적인 수도라면 장강유역 사람들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하는 상해는 중국경제가 새롭게 시작하는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북경 정부는 부패하여 변하고 발전하는 세계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여 무너지는데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존 욕구는 상해로, 상해로 모이게 되었다. 그 속에서 자유와 개혁과 혁명과 사상 그리고 신문, 출판 등 서구적 민주주의와 자유의 꽃이 피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이웃에서 2년 후인 1921년에는 중국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된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모두 이곳을 새로운 나라의 모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삼일운동이 중국공산당 창립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데도 이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별다른 연구 성과가 발표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상해 백년, 북경 천년, 서안 오천년
노신공원에서 있었던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선생의 의거를 비롯해서 중국현대사의 문무를 겸하여 굵직한 사건의 대부분은 상해에서 비롯되었고, 역사적 인물들의 주요활동 무대 역시 상해였다.
상해 백년, 북경 천년, 서안 오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위 세 도시의 역사성을 간명하게 설명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상해는 도시로서의 역사는 매우 짧은 곳이지만 현대사의 집합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상해국제공항에서 나와 택시와 버스를 보면 번호판에 호()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호는 상해의 별칭인데 지역적으로는 지금의 황포강을 가리키지만 본래의 뜻은 물고기 잡는 통발을 의미한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상해를 눈독들이기 전까지 상해는 위의 이름처럼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상해는 황포강과 오송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상해지역은 원래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에 속해있었으나 오월전쟁에서 월나라가 승리하니 당연히 월나라에 귀속되었으며 전국시대 들어와서는 월나라가 몰락하면서 초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 후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를 거치면서 상해현이 생긴 것은 원(元)나라, 1292년의 일이다. 춘추전국시대 이래 이 지역은 몇 번이나 전란이 휩쓸었으나 상해가 쟁탈의 요충지가 된 적은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상해는 한적한 일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역의 중심은 소주였고, 상해는 그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 없는 어촌에 영국 상선이 무기를 장재(裝載)하고 청나라 정부의 금기를 깨뜨리고 상해에 상륙한 것이 1832년 6월의 일이다.
외국인은 광저우 이외의 지역에 출입할 수 없었으나 영국은 이를 무시하고 상해를 정찰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벌어질 아편전쟁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상인들은 중국 해안의 상황, 군대의 수, 군함, 포대 등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하고 이를 영국 정부에 보고했다. 특히 포대는 포대의 형태만 갖추고 있을 뿐 실제로 포가 없다는 사실까지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18일 동안 상해의 안팎을 시찰했는데 부패하고 안일한 청나라 지방 관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폭풍으로 인해 영국 해군의 출항이 늦어졌다"고 북경에 보고했다.
종이신문정보 : 20090807일자 1판 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08-06 오후 9: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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