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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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이천일보(09. 7.27)
마을 휘도는 하천 사이엔 정겨움 흐르고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는 도시 항주와 서호 3
▲수향주장(水鄕周庄)
5월30일, 새벽부터 부산했다. 상해의 푸동공항을 떠나 인천국제공항에 닿는 시간은 밤 11시50분쯤 된다. 떠나오기 전 마지막 하루를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주장을 향해서 열심히 달린다. 앞으로 볼 것이 많기 때문이다. 주장에는 이런 말이 전해온다.
"위에는 천당이 있고 아래는 항소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주장이 있는데, 그 매력은 막을 수가 없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中間有一個周庄 周庄的魅力是難以抵御的)"
버스에서 내리니 작은 촌인데도 넓은 광장이 보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이 지역을 새롭게 정리했다고 한다. 멀리 관광지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에는 석패방(石牌坊)이 보이는데 위에는 예서체로 정풍택국(貞豊澤國)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정풍이 주장의 옛 이름이니 정풍수향이라고 해석이 된다. 동네 이름 주장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정풍이라고 패방에 올린 것은 역사가 깊은 동네라는 뜻이 함유되어 있으리라.
주장은 사람도 거의 없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북송(1086) 원우원년(元祐元年) 때 주 씨 성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 불교를 신봉하고 자신의 많은 땅을 내놓아 전복사(全福寺)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노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서 고을 이름을 '주장'이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전복강사(全福講寺)라고 한다.
주장을 생각 없이 바라보면 이웃한 동리나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동리는 운하 물길 양옆으로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있으나 주장은 물길 양 옆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고 집 앞에는 배가 닿도록 되어 있어 사람과 짐이 오르고 내리는 부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리보다는 공간이 좁고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만큼 더 고풍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좁은 하천 사이사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돌다리, 물길 가에 세워진 집들, 물가로 이어진 돌계단 끝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손님을 태우고 지나는 작은 배들이 정겹다.
주장 마을은 기이한 풍광을 볼 것은 없지만 오밀조밀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마을 앞에 험한 개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뒤편에 황량한 다리가 펼쳐진 것도 아니어서 어찌 보면 편벽한 곳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동네를 걷다보면 큰 집 앞에는 전용부두가 설치되어 있는 듯하다. 수로는 바로 사통팔달의 큰 길이고 부두는 대문과 같은 것이므로 부호들이 다른 사람의 대문을 빌려 왕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보고 싶었던 명대 초기에 강남의 제일 부호 심만삼(沈萬三)의 집 심청(沈廳)을 찾았는데 역시 문 앞에는 부두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홍교가 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으리라.
'주장진지(周庄鎭志)'에 보면 심청의 원명은 경업당(敬業堂)이었는데 심만삼의 후예 심본인(沈本仁)이 청대 말에 오래된 명대의 건물을 개축하여(1742) 송무당(松茂堂)이라 했다고 한다. 심청 거실에 가면 손무당 편액을 볼 수 있다. 심청 안에 들어가면 현관에 이 집 주인 심만삼의 좌상이 있는데 그 뒤편에는 만세복택(萬世福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집과 터는 복과 영광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길지(吉地)라는 뜻이리라.
상당히 좁은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어 인상적인데 자신의 것을 감추고자 하는 당시 상인들의 신중한 태도가 드러나는 듯 했다. 전체적으로 지극히 검소하다는 느낌이다. 퇴직관리들이라면 심만삼보다 재산이 적다하더라도 이보다 좋은 집을 소유했을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강남 제일 부자가 생겨날 수 있을까? '주장진지'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장은 소읍에 불과하다. 그러나 양자강과 황포강, 그리고 운하가 인접한 곳이어서 일단 배를 띄우면 운하를 통해 남북으로 항해할 수 있고 양자강을 통해 동서로 운항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는 인구와 물자가 풍부한 항가호(抗嘉湖) 지역과 소주, 무석(無錫) 일대를 석권할 수 있고 다시 양자강과 항주만을 통해 동남아는 물론이고 더욱 먼 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명대에 정화(鄭和)가 출항했던 유하(瀏河)도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심만삼은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잘 이용하여 경제적으로는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봉건왕조와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다. 일단 관리들과 한 번 충돌하게 되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周元璋, 1328~1398)이 명나라를 남경에 세우고 궁궐을 짓고 성을 높이 쌓아 그 위세를 널리 펴고자 했을 때 일이다. 여기에 뒤따라 재정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강남의 부호들은 재력이, 백성들은 부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나설 때가 된 것을 알고 있는 심만삼은 조정에 들어가 성벽건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홍무문(洪武門)과 수서문(水西門)의 비용을 전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거금이다. 조정은 물론 백성들까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칭송이 자자했다.
거칠고 의심이 그지없는 주원장은 자신 외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인정받는 자는 자칫 잘못하면 국가의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초기에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곧 사형을 명했다. 아마도 상인 주제에 거금으로 조정을 능멸하려 했다는 죄명이었으리라. 이유는 모르지만 생명만은 부지되어 운남성으로 쫓겨나 결국 귀향하지 못한 채 객사하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강남 사람들은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듯 아프게 절망했을까! 그래서 심만삼 이후에는 거금도 권력도 버리고, 자연처럼 물처럼 살면서 원림을 짓고 살기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신문정보 : 20090727일자 1판 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07-26 오후 8: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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