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근대화론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09. 3. 4)
근대화론
조우성의 미추홀
1937년 12월10일 일본군은 중국 남경을 침략했다.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그 이튿날 밤 인천부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남경 함락을 축하하는 제등 행렬을 벌였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 채 벌인 군국의 쇼였다.
1943년 6월에 발간된 월간지 '인천(仁川)'에는 '인천 보국호(報國號) 헌납식'이란 기사가 실려 있다. '25만 부민이 정성을 모아 헌납한 해군기의 명명식을 6월6일 경성공설운동장에서 장엄하게 거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부민을 대표한 이께다 부윤을 비롯해 수십 명의 인천 헌납자 외에 경성, 부산, 대구 등지의 19개 단체도 참여했다. 비행기는 제1인천부민호(함상 폭격기), 제2인천부민호(연습기)로 각각 명명되었다" 등등.
그렇듯 군국 일본은 남경에서 나치와 다름없는 대학살을 자행해 무고한 중국인 30여만 명을 불귀의 원혼으로 만들었고,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에서는 단말마적인 발악으로 밥그릇 공출에서부터 비행기 헌납까지를 강요했던 것이다.
전대미문의 광기로 점철된 시공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조선인들이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이란 미명 아래 자행된 침탈 앞에서 이리 내몰리고 저리 쫓기며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해 갔던 것은 누구나 두루 배워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은 무언가 공부를 좀 했다는 자들이 일각에서 같잖은 논리로 종종 식민지근대화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는 식의 가치중립적 논지가 대부분이다. 저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아니하고 고답하게 말로써 판단만 하겠다는 것이니 구상유취(口尙乳臭)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객원논설위원
종이신문 : 20090304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9-03-03 오후 8:58:52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