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한국의 엘리트, 전문가부터 변해야 한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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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8.12.20)
한국의 엘리트, 전문가부터 변해야 한다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역사소설가
▲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위기가 아닌 시기가 과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위기는 심각하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특히 ‘사람을 믿지 못하는 위기’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의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국 가운데 최하위인 27%(2010∼2014년 조사). 5∼6년 전 조사이므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두 전직 대통령과 권력기관 책임자들의 단죄와 감옥행 외에도 사법 농단, 공금 횡령, 부정 취업, 불법 사찰, 권력기관 사칭에 범람하는 가짜뉴스까지 더하면 더 악화되면 되었지 좋아졌을 것 같지는 않다. 이웃나라 중국은 54% 수준이고 일본도 40%.
일찍이 러셀은 ‘중국인은 믿기 전까지 의심하는 특질’이고 ‘일본은 불신하기 전까지 믿는 성향’이라고 했었는데 이런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의 27% 수준은 민망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우리의 ‘신뢰 위기’에 엘리트 집단의 윤리의식과 책임의식 빈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암담한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엘리트를 ‘유명 명문대 출신에 고시에 합격하거나 재벌 기업에서 높은 보수와 출세 코스를 밟은 사람’들로 인식해왔다. 그들이 일탈하는 경우 ‘어쩌다 줄을 잘못 섰거나’, ‘너무 똑똑해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간단히 여겼다.
97년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상태에 몰려 IMF 관리 체제라는 굴욕을 맛볼 때 대다수의 경제학자, 주류 언론, 국책연구기관은 온갖 처방전을 내놓았는데 그 결과가 어떤가? 급진적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로 체질화되면서 불평등 국가가 되었고, 산업 정책의 실종, 내수시장의 하강 곡선이다.
그 잘난(?) 분들 가운데 적어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 경우가 몇 퍼센트나 되느냐. 조선 말기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관료들이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변화를 읽었던가? IMF 위기 당시 사법고시·행정고시 출신 우등생 검판사나 관료들이 국가 부도 사태를 경고했던가? 세계 명문대 출신의 경제학 박사들 가운데서 장래를 내다본 개선책을 제시했던가? 정당이나 국책연구기관의 전문가들 가운데 북한·중국·일본·미국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몇이었던가?
위기 때마다 그들은 아무런 일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국민들에게는 별로 기억나지 않으면서 그저 똑똑한 사람 이상의 역할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로르 블로 기자는 「21세기 엘리트」에서 "과거 시스템의 열쇠를 쥐고 있던 20세기 특권층의 상당수가 테크놀로지 폭주 속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우리의 경우 ‘명문대 출신의 학자, 정치인, 금융인, 기업가, 고위 관료들이 변화의 언저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 이미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여러 분야의 기득권층에서 윤리 기준은 사라졌다는 자조가 돌 정도다.
지금 한국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조직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목동 역할’만큼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들이 키우는 가축을 살찌우는 데 있어서는 집요하고 탁월하다. 요즘 법원의 판사들을 보면 보다 극명해진다. 권력과 금력에 최적화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가 27%의 신뢰 비율이 나타난 것만도 썩 다행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일본의 ‘뉴(new) 엘리트’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도 곱씹어봐야 할 터이다. 새로운 엘리트는 누구인가? 우선 그들은 ‘학력’이 아니라 ‘학습력’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학력이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학습력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능력이자 씩씩한 전진형 자세다. 새로운 변화 속에서 새롭게 배우는 자세, 어떤 성품을 가진 상대와도 장점만큼은 존중해주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유연한 포용력,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공헌을 보람으로 여기는 사회인으로서의 의식, 성평등과 안전에 대한 경의를 가진 등등의 인물이다.
한국사회의 위기는 한둘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엘리트들,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의 대오각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제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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