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문화칼럼/불러선 안될 노래 '선구자'(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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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8.10.14)
불러선 안될 노래 '선구자'
이원규 문화칼럼
엊그제 나온 '중앙선데이' 오피니언란에 세계적 성악가 조수미씨가, 지난 8월 베이징올림픽 기념콘서트에서 가곡 '선구자'를 부를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회고한 글이 실려 있다. 공연 직전 극장감독으로부터 그 곡을 빼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른 곡으로 급히 바꿔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수미씨는 마침 광복절이 들어 있는 8월인데다 그것이 독립투쟁을 한 선구자의 거룩한 정신을 담았다고 생각해 선곡한 듯하다. 그러나 노래의 무대인 북간도가 조선인들이 개척한 조선의 땅이었고 항일투쟁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담고 있어 중국 당국의 동북공정과 충돌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기고문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착잡해졌다. 중국 당국이 연주회 직전 그렇게 요청할 만큼 동북공정에 민감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 차라리 그 노래를 안 부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 그리고 조수미씨와 음악인들에게 '선구자'는 친일시인과 작곡자가 진실을 속인 곡이니 불러서는 안된다는 말을 어떻게든 전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떠올랐다.
'일송정 푸른 솔은…'. 윤해영의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선구자'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으로 뽑혔던 곡이다. 1960년대에 이 노래가 각광받기 시작하자 작곡가 조두남은, 1932년 북간도 룽징(龍井)의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동포 청년이 은밀히 찾아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는 밀사라고 하면서 시 한편을 건네주었으며 한참 뒤에 자신이 곡을 붙이게 됐다고, 그리고 그 청년은 그 뒤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는지 소식을 모른다고 회고했다. 노래가 워낙 장중한데다가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던진 독립투사와의 만남을 담은 에피소드까지 있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친일의혹을 처음 제기한 건 인천대학교 오양호 교수의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국어국문학」114호, 1995. 5)이었다. 만주 조선인 문학연구의 대표자인 오교수는 윤해영이 쓴 친일성향이 짙은 시들을 여러 편 발굴해 냈고 그가 바로 '선구자'의 작사자와 동일 인물임도 밝혀냈다. '선구자'를 작시할 1932년까지 윤해영은 애국시를 썼으나 그 후 친일로 변절했다며 안타까워하는 심경을 논문결론에 덧붙였다.
그 뒤 작곡가 조두남은 '선구자' 작곡 외 다른 행적들 때문에 친일 음악인으로 지목되었다. 그 곡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언론사 기자들이나 음악비평가들이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 박살 내지 않고 묻어버린 것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도 그렇게 덮어버린 일이 있다. 2000년6월, 한 신문사의 요청으로 북간도의 독립전쟁 현장을 답사했는데 연변대학의 박창욱 교수가 '선구자'에 대해 더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 알려진 것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1932년이 아니라 1943년에 일본을 찬양하는 '징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작사 작곡되었다는 것, 교회에서 풍금으로 연습했고 증인들이 생존해 있다는 것, 그런데 광복 후 그 노래가 여우가 둔갑하듯이 가사를 바꿔 '용정의 노래'로 둔갑하더니 서울에서 '선구자'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유명해졌다는 것 등이었다.
귀국하여 오양호 교수에게 말하자 조두남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답사 결과를 연재할 때 신문사의 주필과 의논했다. 주필은 일본인들이 좋아할 일이니 덮어두고 가자고 말했고 필자도 동의했다. 20년 동안이나 좋아했던 노래를 시궁창으로 처박을 수는 없었다. 조금씩 세상에 알려져 그 곡의 목숨이 끊어졌으면 했다.
그러나 진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아직도 학생들은 음악수업에서 그 노래를 배우며,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선정되고, 음반에도 실려 나온다. 노래가 장중하고 좋으면 됐지 만들어진 경위가 아무러면 어떠냐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윤해영의 다른 시나 조두남의 다른 가곡은 몰라도 징병 찬양에서 하루아침에 애국선열처럼 속인 '선구자'만은 안 된다. 작사 작곡의 경위와 개변을 둘러싼 기만성에 슬프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
종이신문 : 20081014일자 1판 10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8-10-13 오후 8: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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