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광복절 특별기고]/조광원(19회) 신부 동상 건립에 부쳐(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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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7. 8.15)
[광복절 특별기고] 조광원 신부 동상 건립에 부쳐
/이원규 소설가
▲ 이원규 소설가
애국지사이자 성공회 사제인 조광원(趙光元, 세례명 조마가 1897~1972) 신부의 동상이 엊그제 향리인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서 제막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미리 알았으면 제막식에 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리고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동상이 섰으니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조봉암 평전>을 쓸 때 자료를 찾아 매달렸다. 죽산의 농림부 장관 시절 비서이자 조 신부의 아들인 고 조병선 선생을 여러 차례 뵈었다.
그 과정에서 조 신부의 관용의 성품과 화통한 풍모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조 신부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393번지에서 출생해 강화보통학교를 다녔다. 온수리에 성공회성당이 있어서 유년기에 신자가 되었다. 보통학교 2학년 때 강화내성 남문 밖으로 이사했고 남문 바로 안쪽에 살던 조봉암과 단짝으로 지냈다. 1914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 1919년 3월 7일 졸업했다.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일본계 야스다(安田)은행에 취직돼 있었으나 졸업 직전 동기생 몇 사람과 더불어 인천시내의 만세 시위를 앞장서 계획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검거바람이 불자 고향 강화로 탈출, 마니산에 숨어 체포를 면했다.
야스다은행에 들어간 그는 성공회 일에도 매달려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성공회의 트롤로프(M.N. Trollpe) 주교는 하와이로 가라는 명을 내렸다.
본격적인 사제 수업과 함께 하와이 동포들을 위무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하와이로 간 그는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성루가교회 관할사제로서 노동의 고단함과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위로했다.
그리고 모국어교육을 통해 동포 2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도 열정을 바쳤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한인자위단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하는 일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에도 매진했다.
1944년 9월 미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해 사이판 전투에 참전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하였으므로 전선에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동포 병사들을 구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가 승리한 미군에게 관용을 설득했던 것이다.
1945년 9월 조 신부는 미군의 군종신부로 고국에 돌아왔다.
미군정의 국방기구 통위부(統衛部) 담당 장군의 고문 역할을 하다가 2년 후 목회 일을 하기 위해 다시 하와이로 갔다. 1950년 봄 하와이를 떠나 일본 고베로 가서 시무했고 갑년이 되던 1957년에는 모천회귀하는 연어처럼 모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온수리성당 관할사제로 시무했다.
폭넓은 세계관과 다양한 식견, 그리고 관용이 몸에 밴 조 신부의 큰 관심사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이었다. 1960년 대한성공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회원교단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본격화했다. 당시 교회일치운동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에까지 폭넓게 진행됐다.
유년시절 친구 죽산 조봉암과는 1952년 임시수도 부산의 광복동 냉면집에서 해후했다. 조선일보 기자인 딸 조경희(趙敬姬, 1918~2005, 뒷날 정무장관)가 피난하지 못해 인공치하 서울에서 부역한 죄로 사형 구형을 당한 것을 죽산이 구명한 것에 감사하는 대화를 나눈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조 신부는 자신이 독립투쟁을 한 것을 내세우지 않아 1999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오늘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 신부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가 평생 일관되게 지켰던 정정당당함, 그리고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그의 죽마고우였던 죽산 선생도 이제는 훈장도 받고 동상도 섰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이원규 소설가
2017년 08월 15일 00:05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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