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이게 뭡니까’ 하던 질타가 그립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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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6.)
‘이게 뭡니까’ 하던 질타가 그립다
/ 나채훈 삼국지리더십 연구소장
▲ 나채훈 삼국지리더십 연구소장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당 총서기에 오르려면 30대에 차관급, 40대에 장관급, 50대에 각자 전문 분야에서 성과를 올리며 전국적 인지도를 쌓은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추대되는 코스가 필수적이다. 여기에 당 원로(元老)들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요즘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쑨정차이(孫政才), 후춘화(胡春華)를 비롯해 천민얼이나 루하오 등을 보면 이해가 빠를 터이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암묵적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 1.부처님과 노자(老子), 공자(孔子)가 담소하고 있는데 죽은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데리고 나타났다. 살아있을 때 문화혁명을 한다고 공자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중국의 못된 선조처럼 깔아뭉갰던 데 대해 용서를 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큰절을 하도록 마오쩌둥에게 시킨 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부처님과 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서해 주라"고 했으나 공자는 "저들은 여기서도 나를 몰아내려 왔을 것"이라며 돌아앉았다. 자칫 권세를 함부로 남용하면 사후에도 용서받기 힘들다는 의미쯤으로 받아들이면 될 터. 때로 역사적 진실을 비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여겨도 무난할 것이다.
# 2.중국 공산당 최고 정책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요 안건을 두고 기립 표결로 찬반을 결정하는데 덩샤오핑 한 사람만이 기립했다. 그러자 "일어선 사람의 키나 앉아 있는 사람의 키나 같다"며 사회자가 ‘만장일치 통과’라며 의사봉을 두들기려 하자 덩샤오핑은 책상 위로 뛰어올라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키가 1m50㎝, 키 작은 덩샤오핑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작은 키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큰 땅덩이를 업고 버틴 부도옹(不倒翁)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개혁정치를 내건 이래 그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을 다독이고 밀어내기를 17년. 그 끈기와 반대파를 껴안는 지도력과 동시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는 자세와 소신에 방점을 둘 수도 있다.
# 3.후야오방, 자오쯔양 등 당 총서기가 잇달아 실각하면서 베이징에 정변이 있을 때였다. 공산당 본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나귀 한 마리가 버티고 서서 이를 어떻게 쫓아버릴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처음에 리펑이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나귀는 리펑을 한 번 응시하더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히히힝 울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장군 양상쿤이 나섰다. 그는 대포를 쏘겠다며 위협했다. 당나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장쩌민이 당나귀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무엇인가 소곤댔다. 그러자 당나귀는 화들짝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덩샤오핑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자 장쩌민이 "만약 길을 비키지 않으면 너를 당 총서기에 앉히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얼마나 위험하며 바늘방석이나 마찬가지임을 빗댄 우화인데 덩샤오핑이 바로 그 의미를 깨닫고 장쩌민을 발탁했다는 이야기다.
대도무사(大道無私)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있고, 권모술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있기 마련이다. 대도무사형(型)은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發光) 정치인이고, 권모술수형은 대개가 누군가의 힘을 입으려는 후광(後光) 정치인이라고 보면 될 터인데,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아랑곳 않고 후광을 마치 자신의 발광처럼 뽐내고 으스댄다.
총선이 끝난 지 겨우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후광효과를 보려는 성향이 정치판에 횡행하고 있다. 줏대는 없고 누구 후광이 더 밝으냐는 경쟁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넘쳐난다. 후광에 눈이 부셔 국민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보이지 않나 보다. 걸핏하면 "국민이 하나가 돼 역량을 결집해 나가자"느니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공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희망찬 미래를 열어 가자"는 따위의 헛구호만 늘어놓으면서 정작 정치한다는 그들이 서로 쪼개지고, 싸우고, 헐뜯고, 급기야는 ‘동네 양아치만도 못한 짓’을 서슴없이 행한다.
한중일 삼국의 서로 ‘다름’은 분명하겠으나 정치지도자의 덕목이나 해야 할 도리는 별로 다를 바 없다. 역사와 소신, 자리의 어려움을 두고 ‘이게 뭡니까’ 질타하던 때가 된 것 같다.
2016년 05월 24일 화요일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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