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곳 : 인천일보(16. 5.11)

[지용택 칼럼] 왜 '사기(史記)'인가 (6)

여태후를 어째서 '본기(本紀)'에 실었나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여태후 석상

사기 '본기'에 여치(呂雉), 즉 여태후(呂太后)는 유방이 미천할 때 맞이한 부인으로 아들 혜제(惠帝, 유영)와 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은 정실부인으로 돼 있다. 하지만 여태후는 자신의 소생을 비롯해 유방의 비빈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 여덟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한 권력에 매몰된 독한 여인이었다.

여태후는 한 고조의 정비이긴 했지만, 유방에게는 이미 조희(曺嬉)라는 여인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 유비(劉肥)가 있었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 중국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제나라의 왕으로 봉한 것을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남모르는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여치는 첫 번째 부인은 아니었지만 창업에 공로가 있었다. 가난한 떠돌이 생활 시절 만났던 조희보다 여치의 집안은 좀 더 힘과 여유가 있는 가문이라고 생각된다. 여치는 항우의 포로가 됐다가 두 진영간 평화협정이 체결돼서야 석방되는 험난한 일도 겪었다.

유방의 성장과정에서 여치의 내조는 분명히 힘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의 신분상승을 위해 여치가 만들어낸 이야기 중 하나는 유방이 깊은 산속에 숨어있어도 번번이 여치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는데 "유방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서기(瑞氣)가 떠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전설이 됐고, 이 전설은 곧 유방을 하늘에서 점지한 황제라는 신분세탁의 정설로 퍼진다.

유방이 승기를 잡은 전쟁터에 나갈 때는 늘 총애를 입은 척(戚)부인과 동행했고 그 사이에는 자신의 모습과 성격이 가장 닮았다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을 뒀다. 태자 유영이 인자하지만 너무 유약하다고 생각한 유방은 태자를 폐하고 자기를 닮은 여의로 대를 이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여후는 마음속에 질투와 한을 겹겹이 쌓아나갔다.

유방이 황제가 된 지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유영이 등극하게 되니 이가 바로 혜제였다. 이때부터 여후는 태후가 돼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 나갔다.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을 궁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가둬두는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조(趙)왕으로 나가있던 여의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입궁케 해 혜제가 없는 틈을 타 독살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척부인의 손, 발을 모두 자르고 눈알을 뽑았으며, 귀에 뜨거운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를 만든 뒤 약을 먹여 벙어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몸뚱이만 남은 척부인을 돼지우리에 던져놓고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며칠 후 여태후는 아들 혜제에게 인간돼지를 보여줬다. 혜제는 꿈틀거리는 돼지가 척부인임을 알자 대성통곡했고, 그날로 병이 들어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는 사람을 보내 여태후에게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병들어 보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죽는다. 혜제의 보위기간 7년 그리고 혜제 이후 여태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도합 15년 동안 한나라는 여태후의 천하가 지속된다.

여기에 주목할 대목이 있다. 질투의 대상이던 척부인 그리고 아들의 보위를 위협했던 척부인의 아들 여의(사실 여의는 나이가 어려서 보위를 넘볼 처지가 아니었다)를 죽였으면 그만이지, 친아들 혜제에게 그 참혹한 장면을 숨기지 않고 일부러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 혜제가 자혜롭긴 하지만 심신이 허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대목을 다르게 본다면 여태후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참혹한 광경을 아들에게 보여줘 충격에 빠진 나머지 병석에 몸져눕게 했다. 그도 모자라 결국 아들로부터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라는 일종의 정치포기각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참으로 악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의 상중에 여태후는 곡만 할 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개국공신 장량(張良)의 아들 장벽강이 나이 15세로 시중으로 있었다. 그가 승상 진평에게 그 이유에 대해 말했다. "세상을 떠난 혜제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없어 승상 같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씨 문중인 여태, 여산 및 여록을 장군으로 삼은 뒤 남군과 북군을 통솔케 하고 여씨 일족을 모두 입궁시켜 조정 일을 보도록 청하면 태후가 안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승상이 이 계책을 시행하자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비로소 애통하게 울기 시작했다. 여씨 일문이 한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됐고 조정의 모든 명령은 여태후로부터 나왔다.

여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유방의 후손이 제후로 있는 나라에 여씨 집안의 딸들을 제멋대로 정략결혼시켰다. 그 중 가장 황당한 일은 자신의 딸 노원공주와 조왕 장오(張敖) 사이에 태어난 딸을 자신의 아들 혜제와 혼인시키고 황후로 만든 일이다.

이것은 여태후가 유씨천하를 잠식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황후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황후는 거짓으로 임신한 척해 혜제와 합궁해 태어난 궁녀의 소생을 자신의 아이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유공(劉恭) 소제(少帝)로 제위에 오른다.

여태후는 그 아이의 어미를 살려두면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해 살해했다. 세월이 흘러 소제가 이 사실을 알았다는 소식을 듣고 여태후는 변란을 걱정해 소제를 남모르게 죽였다.

여태후는 혜제와 또 다른 궁인 사이에서 태어난 상산왕 유의(劉義)를 유홍(劉弘)으로 개명해 원년(元年)도 없이 황제로 즉위시키는 등 횡포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또 자신의 아들인 태자 유영을 폐인으로 만들고, 그 후손인 손자들도 마음에 걸리면 모조리 죽였다. 유방의 다른 부인 소생인 유회(劉恢), 유우(劉友)를 죽이고 유건(劉建)의 후사도 끊어 봉읍을 없앴다. 남편의 소생을 그렇게 무참하게 처단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를 세우는 데 무장으로서 공훈을 따진다면 서열 1, 2등이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여태후는 역적으로 몰려 적소로 유배가는 이들을 장안으로 끌고 와 참수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잔혹성은 여태후의 천성을 의심하게 한다.

혜제가 죽고 나서 8년 만에(BC180) 여태후가 죽었다. 유방의 고향 패현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한나라를 세운 사람 중에 소하, 장량 등은 세상을 떠났고 조정에 있던 사람은 진평과 주발뿐이었다. 이들은 유방의 자손들과 함께 짧은 시간에 여씨 일족을 처단했다.

여씨 집안이 군과 조정을 장악했지만 뿌리가 없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하루아침에 망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같다. 유방의 사후에도 진평과 주발은 여씨의 나라에서 유씨의 나라로 돌려놓는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유방의 탁월한 안목이며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의거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다음 황제를 누구로 모실 것인가는 의거를 결행한 일보다 더 생사가 달린 일이다.

첫째 후보는 여태후가 무서워 좌불안석의 삶을 살아온 유방의 맏아들 유비가 있었다. 그러나 유비의 외가 사(駟)씨는 유명한 악인으로 소문이 자자해서 또다시 여씨와 같은 일을 꾸미는 후환이 두렵다는 생각에 다들 의견이 일치했다. 다음 후보로는 장안에서 멀고 먼 지금의 하북성 서북쪽 대(代) 땅에서 죽은 듯 살아온 유항(劉恒)이 있었다. 외가는 박(薄)씨인데 세가 성하지 않고 선량할 뿐만 아니라 여씨와 사돈을 맺은 바 없어 그를 황제로 모시니 바로 효문제(孝文帝)였다.

한나라의 역사는 분명 혜제가 두 번째 황제로 돼 있지만, 황제의 기록인 본기에는 없다. 그 대신에 황제도 아닌 여태후를 올린 것은 부당하다고 뒤를 이은 학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와 '사통(史通)'의 저자 유지기(劉知幾)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열전에나 있어야 할 여태후가 본기에 기록돼 있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태후 본기에 보면 여태후의 정치적 실적은 보이지 않고 주로 사생활과 포악한 살인행위만이 나열돼 있다.

누가 보더라도 여태후는 본기에 오를 만한 사람이 아닌데, 사마천 같이 탁월한 사관을 가진 역사가가 그런 오류를 범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15년간 통치한 사람은 여태후이기 때문에 본기에 올렸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태후를 열전보다는 본기에 실어 그 잔악함과 횡포를 좀 더 적나라하게 기록해 후세에 경계가 되도록 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2016년 05월 11일 00:05 수요일